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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봄날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by 답설재 2020. 1. 10.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봄날 지음, 반비, 2019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수학여행을 보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엄마도 거들어줘서 간신히 허락을 받아내어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담임교사와 교감 선생의 "공납금도 제대로 못 내는 주제에 무슨 수학여행이냐? 그 돈으로 공납금이나 내라."라는 한 마디에 나는 수학여행을 포기했다. 전부 돈이 문제였다. 담임교사는 내가 어떤 환경에서 사는지 알려고 들지 않았고, 공부 잘하고 돈 많은 집안의 아이들에게만 신경 썼다. 담임교사의 눈에 나는 그저 가난하고 지질한 아이였다.(21~22)

 

내가 20여 년간 경험한 성매매 업소는 나를 때린 아버지와 어린 나를 성추행한 삼촌과 나를 강간하며 웃던 그놈, 임신한 나를 버리고 간 군인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46~47)

 

(…) 술을 버리다가 또 들켜서 또다시 빚이 늘어날까 두려워 전부 마시며 매상을 올렸다. 결국 위장병을 얻었고 질염도 심해졌다. 병원비도 내가 벌어야 감당할 수 있는 돈이었다. 아파도 약국에서 임시로 사 먹는 약이 전부였다. 이 업소는 지각비도 출근 시간 30분 후부터 꼬박꼬박 받았기에 나는 술을 많이 마셔 토하느라 밥 한 끼 못 먹어도, 밑이 빠질 것 같이 아파도 벌금으로 나가는 돈이 아까워 출근 시간을 칼 같이 지켰다.(101~102)

 

비행편은 밤늦은 시각이었다. 시간이 늦었는데도 공항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들 여행을 가는 것인지 사방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낯선 공항도 싫었지만 저렇게 웃는 사람들이 나는 싫었다. 나는 저 비행기에 실려 제주도로 팔려 가는 처지인데, 공항의 불빛도, 비행기도, 웃는 사람도, 옆에서 말을 거는 아가씨들도 싫었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물만 마시고 화장실만 몇 번 다녀왔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이라면 빨리 출발했으면 하고 조바심이 났다.(133)

 

어느 날은 마담이 유별나게 손님 잘 모시라고 강조하면서 룸으로 들여보냈다. (…) 그날 이후 업주의 애인이 가끔 찾아와서 접대를 받는 모습을 보았다. 그 남자는 공무원으로서 직위도 있는 사람이었고 그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144)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필요한 물건은 없는지 둘러보았다. 삐거덕거리는 침대, 거울이 달린 작은 화장대가 전부인 이곳에서 적응하고 견뎌야 할 시간들이 앞으로 얼마나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었다. 그러나 살아야 했고 살아가야 했기에 짐을 풀어 정리하고 청소를 시작했다.(167)

 

아가씨들은 식사를 하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꾹 참고 제주도를 떠난다고만 했다. 아가씨들은 다들 부럽다면서 어디 가더라도 아프지 말고 자주 연락하자고 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소리 없이 울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떠나가는 길이 너무나 무서웠다.(180)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 빚을 갚고 업소를 나오고 싶었지만, 내 몸도 영혼도 이제는 늙어버린 탓에 팔 수가 없었다. 나이 많고 병든 몸으로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버거운 형편이 자신이 싫었다. 지금 타고 가는 이 버스가 교통사고라도 나서 이 길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300)

 

집도 사고 차도 산다던 그 말에 나는 잠시 힘들겠지만 조금만 견디면 가족들과 잘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안고 살았다. 하지만 아무리 일을 해도 빚은 계속 늘어났고 몸은 망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책임지지 않았다. 업주는 자기 말만 잘 들으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지만, 어떻게 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살 수 있는지, 돈은 어떻게 하면 버는지 나는 지금도 모른다.(320)

 

구매자와 단 둘이 있는 공간에서 아가씨들이 온갖 폭력을 견딘 대가로 벌어들인 돈으로 업주는 호강하고 살았다. 자식은 해외 연수나 유학을 보냈고, 의사 사위에게 돈을 들여 딸을 시집보냈다. 돈이 없는 것,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이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업주는 갈 곳이라고는 업소밖에 없는 나의 인생을 앗아간 사람들이다. 특정 업종의 업주가 더 악랄하고 나쁜 게 아니었다.(323)

 

성매매 업소에서 일한 20여 년간 만난 구매자들의 행태는 나이, 학력, 종교, 결혼 여부,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직업, 정치적 성향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돈으로 내 몸을 샀다고 여기며 마음대로 대했고 죄책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326)

 

수술 날짜에 맞춰서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며 마음이 무너졌다. 애써 참았던 눈물이 터져 방문을 닫고 한참을 울었다. 언젠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아기를 갖고 살고 싶었던 꿈이 아마도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건강해져서 열심히 살자며 내 마음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364)

 

내가 당한 폭력이 폭력임을 직면하지 못했던 나의 마음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직면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결국 나의 몸을 뚫고 올라왔고, 그래서 오랜 기간 몸을 아프게 한 것이었다. 내 몸은 나에게 계속 아프다고 말했지만, 나는 살아가기 급급했기에 내 마음 한 번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