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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그림을 보고 쓰러진 사람

by 답설재 2019. 12. 27.

 

 

 

1

 

월간 『현대문학』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가 연재되고 있었습니다. 그 소설을 읽는 재미로 다음 달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소설에서는 그림도 소개되곤 했는데 「델프트 풍경」도 그중 한 작품이었습니다. 「델프트 풍경」은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집중적으로 파헤친 그 베르메르의 작품입니다.

2010년 1월호 연재의 각주(脚註)에는 그 그림을 소재로 한 프루스트의 일화가 들어 있었는데 그중 일부입니다.

 

베르메르 드 델프트(1632~1675). 프루스트는 1921년 5월 12일, 이제 막 이 네덜란드 화가에 대한 글을 발표한 미술비평가 장루이 보두아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헤이그에 있는 미술관에서 「델프트 풍경」을 본 이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프루스트가 헤이그의 미술관을 처음으로 찾아가 이 그림을 본 것은 1902년 10월이었고 1921년 5월 말 파리의 '죄 드 폼'에서 열린 '네덜란드 거장'전에서 그는 장루이 보두아예와 함께 「델프트 풍경」을 보다가 실신했다. (…)

 

실신했다?

프루스트가 그 그림을 보다가 실신했다고? 도대체 어떤 그림이기에…… 실신까지?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다가 쓰러질 수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그만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2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죽음』에 이런 현상에 대한 내용이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는 걸 봤습니다.

 

누군가에게 살해(독살)된 가브리엘 웰즈의 영혼(떠돌이 영혼, 유령? 심령?)이 만난 할아버지(물론 역시 떠돌이 영혼) 이냐스 웰즈는 생전에 아내(그러니까 가브리엘의 할머니)로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죽어서조차 지긋지긋해서 멋진 여성 포르노 배우로 환생하고 싶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리고 마침내 그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천사의 배려로 줄 앞으로 가게 된 이냐스는 세 명의 심판관 앞에 선다.

「저는 이미 모든 게 예정돼 있어요. 파리에서 제가 태어나길 기다리는 한 가정에 환생하기만 하면 됩니다. 피갈에 있는 가정이에요.」

_ 「흠._」 대천사 하나가 말문을 연다. 「당신 점수면 이 태아로 환생하는 데 충분해요. 게다가 당신은 특별 접근권이 있는 영매와 사전 조율까지 마쳤군요. 하지만 행정 기관인 우리로서는 당신 소원을 하나 들어주면 반대급부로 핸디캡을 하나 줄 수밖에 없어요.」

_ 「그건 금시초문인데요! 그런 얘긴 못 들었어요! 무슨 핸디캡인데요?」_

_ 「당신이 고를 수 있어요. 큰 병이나 큰 사고, 증후군 중에서.」_

_ 「뭐라고요?_」(87~88)

 

 

3

 

그 재미있는 대화는 더 이어지지만 일단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소개한 그 '증후군'을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흔히 보는 사전 중의 하나에서 찾아봤더니 증후군(症候群)은 이런 것입니다.

 

증후군 [의학] 어떤 공통성이 있는 몇 가지 증후가 함께 나타나는 병적 증세. 증후로서는 일괄할 수가 있으나, 그 원인이 확실치 않아 특정한 병명을 붙이기 어려운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 예로는 대상 증후군, 네프로제 증후군 등이 있다.(다음 사전에서)

 

한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정의해 놓은 증후군은 이렇습니다.

 

정신이 자기 주인을 골탕 먹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특이한 심리적 고착을 정신 의학 용어로는 〈증후군 _syndrome_〉이라고 부른다.(90)

 

정신이 자기 주인을 골탕 먹인다? 어쨌든 그렇게 써놓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몇 가지 대표적인 증후군의 예를 들어놓았는데 맨 처음의 예를 보면 이렇습니다.

 

코타르 증후군: 이 증세를 나타내는 사람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산 사람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해 고통을 느낀다.(90)

 

 

4

 

노아 증후군, 타골라 증후군, 카그라스 증후군, 프레골리 증후군, 투렛 증후군, 선천성 무통각 증후군, 외계인 손 증후군, 트루먼 쇼 증후군은 그만두고 스탕달 증후군은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지 보겠습니다.

 

스탕달 증후군: 스스로 생각하는 완벽한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예술 작품을 대할 때 나타나는 증세이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몸에 열이 오르고 홍조와 현기증이 일어난다. 심한 경우 환자가 졸도하기도 한다.(82)

 

정말 그렇다면, 베르메르의 그림 「델프트 풍경」을 보고 프루스트가 실신한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이런 증후군이라면 나도 좀 걸리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았고 멋진 그림을 더러 봤는데도 쓰러지기는커녕 무덤덤하기만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에게도 스탕달 증후군이 있었다면 멋진 소설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혹 미술 평론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