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보증서

by 답설재 2019. 12. 3.

 

 

 

 

   1

 

휴대전화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휴대하지 않게 되었으니 손목시계에 대한 기억이 까마득한데, 돌연 향수가 일면서 다시 갖고 싶었습니다. 점원에게 물었더니 19,000원이라고 했고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2

 

시계는 잘 가고 있습니다. 정확합니다.

값이 저렴해서 혹 며칠 만에 엉터리라는 게 드러나지 않을까, 잠시 의심도 했지만 전혀 염려할 게 없다는 듯 노래처럼 강물처럼 잘도 흐릅니다.

그게 신기해서 시계 가게를 찾아가 추가로 몇천 원 더 지불하거나 빈말로라도 고맙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언뜻 실없는 생각도 했습니다.

 

 

    3

 

그 애정과 신뢰는 그렇게 시계만 봐도 확실했는데, 무엇을 좀 찾으려고 책상 위를 뒤적이다가 '보증서'라는 걸 발견하게 되자 더욱 깊어졌습니다.

 

아래쪽에 기종, 보증 기간(구입일로부터 2년간), 수기로 된 구입 일자, 구입자 이름과 연락처(서명의 복사본은 내가, 원본은 가게에서 보관), 고무인으로 된 구입 매장 이름 등이 눈에 띄고, 그 위로는 제품 번호, 보증 내용, A/S에 관한 사항, 판매점에게 부탁하는 사항, 개인정보 수집 이용 및 제공 동의에 관한 사항 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이면(裏面)에는 무상 수리와 유상 수리, 교환 및 환불 사유 등이 간결하게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구입하는 대부분의 물건에 이런 보증서가 첨부되지만 내용이 지나치게 많고 글씨는 깨알보다 작은 그 보증서들은(예를 들어 허다한 약품의 설명서의 설명과 주의사항을 보십시오! 여간한 고통 아니면 그걸 읽고도 삼키거나 바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굳이 읽지는 말고 믿어야 할 것은 믿고 책임져야 할 부분은 책임질 것!"을 강요하는 저질의 골치 아픈 문서 같아서 '그렇다면 차라리 읽기라도 그만두는 게 낫겠군!' 생각하게 되는데, 정말 나는 그런 보증서나 설명서를 단 한 번도 완독(完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건 버리기도 찜찜해서 대부분 설합 같은 곳에 두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품 수리 등에 관한 일이 발생했을 때 그 보증서를 보자는 이도 없었지만 무상수리와 유상수리 구분 문제로 그 보증서를 살펴본 적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서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

 

그런데 나는 이번에 단돈 19,000원짜리 시계의 보증서에 이르러 처음으로 그걸 정독(精讀)한 것이었습니다.

우편엽서만 한 종이에 글자 크기도 아주 적당하고 내용이 많지도 않아서 읽기에 성가시거나 귀찮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어린이의 손에 닿지 않게 하라거나 습기 찬 곳에 두지 말라는 등 의례적이거나 쓸데없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고, 어려운 용어를 동원하지도 않았으며, '아하! 수리하러 가고 올 때의 차비는 내가 부담해야 하는구나!'와 같은 내용 때문에 조금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이 엽서 크기의 보증서는 반으로 접혀서 사각봉투 안에 들어 있는데 봉투에는 보증의 개요가 다음과 같이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 본 보증서는 ○○○○가 발행하는 보증서입니다.

* 본 보증서는 정상적인 ○○에 의해 판매되는 제품임을 보증합니다.

* 본 보증서가 없는 경우 어떠한 A/S도 받으실 수 없으므로 보관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 A/S 및 기타 문의 사항이 있는 경우 보증서에 기재된 판매처 또는 아래 연락처로 연락 바랍니다.

 

 

    5

 

나는 지금까지 내가 구입한 시계 가운데 가장 저렴한 그 시계의 보증서를 버리려던 생각을 버리고, 일단 보관해 두기로 했습니다.

그건 내 시계가 저렴하지만 품질이 허접하진 않다는 걸 보증하는 유일한, 그리고 매우 중요한 서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내의 잠꼬대  (0) 2019.12.17
가을이 가는 걸 보셨습니까?  (0) 2019.12.06
혼백이 오는 날  (0) 2019.11.27
유치원에서의 추억  (0) 2019.11.17
책 버리기  (0) 2019.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