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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임승훈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

by 답설재 2019. 7. 25.

임승훈 소설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

문학동네 2019

 

 

 

 

 

 

여덟 편의 슬픈 소설이 들어 있다. 슬프지만 재미있고 즐겁다.

슬픈 내 이야기, 내 슬픈 이야기, 그러면 슬프지만 재미있고 즐거운 내 이야기 여덟 편?

그래서 빠르게 읽혔을까?

 

 

● 졸피뎀과 나

 

임승훈이라는 사람이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11)며 시작하는 얘기.

 

나는 오랜 시간, 어쩌면 인류가 태어나고 사라졌던 긴 시간, 달이 초승달에서 그믐달이 되어갔던 그 시간 동안 지구를 미워했었다. 미워한 만큼 사랑했었다. 아니 사랑했기 때문에 미워했었다. 어쩌면 사랑받고 싶어서 미워했다. 하지만 이제 그 지긋지긋한 사랑도 미움도 근거를 잃고 흩어졌고, (……)(60~61)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 2077년, 여름방학, 첫사랑

 

2077년, 인류는 모두 같은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2015년, 한국에서부터 퍼진 전염병 때문이다. 이 전염병의 치사율은 0퍼센트, 어떤 물리적 고통도 없다. 다만,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얼굴로 변할 뿐이다. 삼십대 중반의 한국 남자 얼굴. 그 얼굴은 다소 우울하고 신경질적으로 생겼다.(65)

 

이렇게 시작되니까 재미없을 수가 없다. 이런 얘기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래, 어떻게 되나 보자!' 싶고, 괜히 저 아무 생각 없는 뭇사람들이 지금부터 고소하다. '그 보라니까! 꼴좋겠다.'

 

 

● 가혹한 소년들

 

사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 그의 사지는 침대의 네 귀퉁이에 결박되어 있었다. 사지뿐만 아니라 몸통도 목도 단단히 묶여 몸의 어느 한 부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75)

 

지금 내가 그렇게 묶여 있는데 묶어놓은 사람이 내 다리를 자르겠다면?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자르겠다면? 그리고 그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정말로 잘랐다면?

 

이런 우리를 누가 인간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사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고아원 선생들이 우리를 매일 두들겨팼던 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짐승은 짐승처럼 다뤄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말없이 맞았습니다. 순종적인 짐승이 되는 것이 우리의 미덕이고, 우리의 목표였습니다. 우리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 고개를 숙이고, 발로 차면 엎드려서 선생님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왜 죄송한 걸까요? 그들이 때리기 때문에 죄송한 겁니다. 그들이 때리지 않으면 죄송하지 않은 겁니다. 물론 우리는 하찮고 무식했으므로 그 방법밖에 없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질서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개돼지 같은 우리는 서로 잡아먹었을 겁니다. 분명 그랬을 겁니다. 아멘, 아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98~99)

 

폭력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이 '은유'가 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실없는 문장이 들어 있지 않아서 시 같기도 하다.

 

이 소설집에는 실없는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문장이 엉망인 소설을 읽을 때마다 괴로워한다. 내 사고가 엉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인기 소설'도 있다. 인기 소설인데도 그런 문장이 수두룩한 소설이 있다.

 

 

● 골키퍼 에릭 홀테의 고양이가 죽은 다음날

 

홀리오 그룬도바의 페널티킥, 그 시간 0.36초 간의 이야기가 121쪽부터 156쪽까지 빠르게, 그렇지만 서둘러 읽을 필요 없이 전개된다.

시 같다면 이 소설이 으뜸일 것 같았다.

 

각주가 여러 군데에 있다.

나는 이 소설의 각주를 읽으며 좋은 각주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령 마이클 샌덜식(『정의란 무엇인가 JUSTISE』). 그의 각주는 읽으나마나다. 나는 그의 책에 붙은 무수한 각주 중에서 맨 처음의 몇 개만 읽었다. 그건 그가 하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진실이거나 사실이라는 걸 명백하게 하기 위한 각주들이 분명하기 때문이었고 그 책을 읽는 동안 그를 의심하고 싶지가 않았다.

 

임승훈의 각주는 마이클 샌덜과 전혀 다르다. 그의 각주를 읽지 않으면 그건 이 소설을 잘못 읽는 것이다. 읽으나마나다.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것이다.

'임승훈의 각주'라는 용어가 생겨도 좋을 것 같았다. 그는 '모름지기 각주란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각주가 이처럼 읽기 좋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 이서진을 닮은 탐정―새가 된 아내

 

승훈은 이서진을 닮은 탐정이었다. 그날은 토요일 오후였다. 사내는 말했다.

― 아내를 찾아주십시오.(159)

 

가슴 아픈 얘기이고 재미있다.

탐정 임승훈은 탐정답게 그 사내의 아내가 정말로 새가 되었고, 폭력을 휘두른 그 남편이 아닌 사람의 '사랑'을 확인했다.

 

손녀를 찾는 할머니와 자물쇠를 든 소녀와 상이군인 두 명은 새를 봤다고 했다. 새는 저 위로, 혹은 성벽 쪽으로 날아갔다고 말했다. 모두들 입을 모아 말했다. 그 새는 너무 못생겼다고. 하지만 그 추한 새는 너무 슬프게 운다고. 맹인도 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 울음소리는 너무 아름답고 슬펐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사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 오래전에는 행복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209)

 

'새가 된 아내'는 전혀 황당한 얘기가 아니었으므로 '이서진을 닮은 탐정' 임승훈도 황당하지 않다.

 

 

● 우울한 복서는 이제 우울하지 않지

 

복서 임승훈이 무너지는 순간의 이야기, 14시 28분 21.05초의 그 순간, 0.02초 뒤에 일어날 그의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 복서 임승훈이 수없는 죽음을 반복해왔으면서도 지금 0.02초 후의 그 순간에 영원히 머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임승훈은 이 소설에서처럼 여덟 편의 소설에서 보여주는 삶의 여정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해주고 있다.

「골키퍼 에릭 홀테의 고양이가 죽은 다음날」과 짝을 이루는 소설 같았다.

 

 

● 비워진 우주의 대기자들

 

뉘·즈제와 줄·즈제 간의 파란만장한 전쟁, 그 속의 우주인들의 삶을 그린 이야기(SF, science fiction).

지구인들이 즈제인(우주인)들을 바라본 이 이야기는, 우리(지구인)가 우리(지구인)를 새롭게 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니까 성실하다는 것은 종종, 혹은 아주 자주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법이다. 성실한 자들의 상상이란 현재를 미래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고, 그들의 상상이란 상상이란 이름의 서투른 자위고, 그들의 상상이란 물려받은 낡은 설계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성실한 자들의 손에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허공에 놓이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이것을 즈제인들은 몰랐다.(275~276)

 

그런 저를 할머니가 키워주셨습니다. 할머니는 엄격한 분이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말했습니다. 기쁨이 온다는 건 곧 불행도 온다는 말이다. 큰 기쁨은 큰 고통의 다른 말일 뿐이다. 행복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것은 거짓이고, 아움1을 게으르게 만든다. 그것은 죄악이다, 라고.(277)2

 

이런 것들이 어떻게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 초여름

 

내가 목을 매단 지 삼 일이 지났다. 지난 삼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지난했던 시간이었고, 가장 답답했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359)

 

그리하여 자살을 시도했던 소설가 임승훈이 마침내 므그느스흠인의 처방으로 지구인으로서의 생체를 버리고 '개조인간'이 된 이야기이다.

소설가 임승훈은 그만큼 소설을 잘 쓰고 싶은 인물이다. 23년 전, 엄마가 키우기 쉬운 아이가 아니라며, 한국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며 미국으로 유학 보낼 때, 시애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동양인 스튜어디스(빅토리아 김)도 인정했다.

 

― 하지만 누나가 볼 때 넌 어른이 되면 더 잘생겨질 거 같아. 똑똑하고 잘생기고 친절한 남자가 될 거 같아. 모두 너를 좋아하게 될 거야. 어쩌면 너는 똑똑하면서 인기가 많은 그런 직업을 가지게 될지도 몰라. 나중에 유명해지면 꼭 와이마날로 해변에 놀러 오렴. 나는 매일 두시에서 다섯시 사이에는 거기서 책을 읽을 거야. 알았지?(368)

 

나는 임승훈이 꼭 그 와이마날로라는 해변에서 빅토리아 김을 만나기 바란다. 그 얘기도 소설이 되어 나오겠지? 빅토리아 김은 자신보다 젊은, 똑똑하고 잘생기고 친절한 남자, 모두들 좋아하는 임승훈을 그 해변에서 어떻게 하려는 생각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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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즈제'인들이 '사람'을 이르는 단어.
2. 빌어먹을 세상, 역겨운 세상, 할머니는 제게 언제나, 행복하길 바라는 건 천박한 마음이라고,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걸 바라지 못한다면 대체 왜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해합니다. 할머니가 하고 싶은 말은(...)(347~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