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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썩어버린 심장

by 답설재 2019. 7. 13.

수리 중인 사이보그(블로그 《까치머리밥》 2019.2.8)

 

 

 

1

 

지독한 피로감이 엄습하면서, 전신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의 뼈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사는 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죽을 수 없다고 해서 스스로 심장을 도려낼 수는 없지 않은가(에밀졸라 장편소설 『목로주점 2』(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2011, 86)

 

심장을? 도려낸다고?

심장이 썩은 나는 심장 얘기만 나오면 돌연 내 심장의 상태를 궁금해합니다. '지금 내 심장은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걸까? 피를 제대로 공급하고 있는 걸까?'…… 그것의 역할이 미흡하다면 인위적으로라도, 그러니까 내 손으로라도 그걸 움직이게 해야 할 것 같은 초조감, 강박감 같은 걸 느낍니다.

 

 

2

 

내 심장이 썩었다고 생각하게 된 건 순전히 '말' 때문이었습니다. 병원을 들락거리며 심장을 '수선'하고 수선한 심장이 잘 돌아가도록 매일 약을 먹고 하니까 '됐다!' 싶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에이, 속상해!"라는 말이 머리를 스치면서 '아하! 나는 바로 그 속이 상한 사람이구나!' 싶었고, 그동안 내남없이 속상하다고 하는 그 표현들이 괜한 것은 아니었구나 싶었던 것입니다.

 

"에이, 속상해!"

자주 그랬습니다. 속으로는 더 많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속상해? 속 어디?

위?

허파?

간?

쓸개?

창자?

심장?

…………

내장 전체?

 

아마도 심장이겠지요?

'속상하다'는 말의 뜻을 보면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1.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하다.
  2. 화가 나거나 걱정이 되는 따위로 인하여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하다.

 

3

 

병원에서는 내 심장을 들여다보고 "썩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핏줄들이 꽉 막힐 지경이었다는 걸 지적했고, 몇 차례에 걸쳐 풍선 같은 걸 집어넣어 뚫었다고 했는데, 그 일 때문에 정기적으로 호출해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하는 중입니다.

 

내가 그 과정에서 생각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병원측에서 그 핏줄들을 뚫을 즈음에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주의해야 할 사항들은 어떤 것들인지 일일이 설명해주었지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 다음부터는 내 핏줄이 막힌 이유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러다가 또 막히면? 병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은 바로는 몇 번 뚫어주면 다음부터는 보험 적용을 해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도 걱정이긴 하지만 어느 날 담당 의사가 당신 때문에 정말 지쳤다거나 십 년도 넘었으니 이젠 만사가 다 귀찮다고 손을 놓아버리면? 그래서 혹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지면?…………

 

핏줄이 막힌 이유를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방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또 막히면 병원에서는 "또 막혔어요?" 하면 그만이고 귀찮다는 생각을 누르고 뚫어주면 그만이겠지만 그럴 때 내 체면이 뭐가 될까 생각하면 심각해지고 이어서 수술실이 떠오르고 밤낮이 없고 소변도 평소처럼은 볼 수가 없는 그 중환자실,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하므로 마음을 둘 일도 없는 그 일반병실이 떠오릅니다.

 

나는 핏줄이 막히는 주요 원인을 속상하는 일, 스트레스라고 단언합니다. 전문가들은 술, 담배, 기름진 음식 같은 것도 고개를 절레래절레 흔드는데, 그건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긴 해도 그것 때문에 핏줄이 '풍선'을 넣어 뚫어야 할 정도로 막힌다는 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않다!"라고 내 주장을 반박한다면 그럼 스트레스 75~85%, 술, 담배, 기름진 음식 등이 15~25%쯤이라고 해두겠습니다.

내가 뭘 알겠습니까? 믿기 싫으면 외면하면 됩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심장 상해하시면 핏줄이 막힌다는 끔찍한 얘기가 됩니다.

 

 

4

 

핏줄 막히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요즘은 의술이 좋아서……" "우리나라 의술이 세계 제일이어서……" 어떻고 하면서 핏줄 뚫은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떠들고 다녔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핏줄도 뚫지 못하고 꼼짝없이 저승으로 가야 했던 선비(先) 얘기를 사례로 들기도 했습니다. 핏줄 뚫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정말 별 것 아니어서 나 같으면 하루에 대여섯 번씩이라도 뚫을 용의가 있다는 듯 허풍을 떨고 다녔습니다.

 

뚫기야 뚫겠지요.

그렇지만 그로 인해서 다른 곳들이 우수수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필수적으로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속상하다'는 말과 비슷한 표현도 생각해보았습니다.

"속이 끓는다."

"속이 썩는다."

"속이 뒤집어진다."

"속이 찢어진다."

"애가 탄다."……

 

그런 표현들은 간과 창자가 썩는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그것도 끔찍합니다. 썩어서 냄새가 쿨쿨 나는 간과 창자를 넣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까짓 거 너무 속상해하거나 속을 끓이거나 하지 말고 살자, 생각하는 나날입니다.

어디서 "아이고~ 일찍도 하시지……" 하고 비꼬는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사실은 이런 생각조차 '매일 반복'일 뿐입니다. 어제도 허사였고, 오늘도 허사여서 허구한 날 '내일은!' '내일부턴!' 할 뿐입니다.

 

세상에 맡기겠다고, 걱정은 그만하겠다고 했던, 만년의 그 올리버 색스를 생각합니다. 그도 겨우 1년 전에 그런 다짐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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