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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커피에 대한 한 아이디어

by 답설재 2019. 6. 22.

 

"COFFEE IS ALWAYS A GOOD IDEA" 2018.10.5.

 

 

 

 

    1

 

  아내는 또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소리 내어 커피콩을 갈고 물을 부어 내리는 일이 또 나 혼자만을 위한 일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멋쩍은 일입니다.

  건강에 좋다고 하고는 금방 또 문제가 있다고 발표하는 식으로 오락가락 하니 그런 일이 벌어지고 그러면 그런 문제엔 문외한인 나는 난처한 입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극단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고약한 학자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발표하는 경우라 할지라도―가령 누가 돈을 왕창 벌게 해 주거나 쫄딱 망하게 하고 싶을 때―그동안 커피가 건강에 좋다고 한 내용과 그렇지 않다고 한 내용들의 개요도 함께 발표해주면 소비자들이 종합적으로 판단하기에 차라리 더 좋겠습니다.

  어쨌든 아내도 여기저기 고장이 난 데가 있기 때문에 커피 한 잔 마시자고 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웬만한 식품이 거의 그렇듯 기분 좋게 마시면 좋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설득이 될 수 있고, 그런 걸 다 설득하며 지낸다는 건 우스운 일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2

 

  집에서 마시는 커피가 저 커피숍이나 카페, 다방에서 마시는 커피와 같은 맛일 수는 없고 같은 의미일 수도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커피를 마실 때 떠오르는 생각, 그럴 때의 느낌은 밖에서 마실 때와 또 다른 면모가 있어서 '이건 단순한 일이 아니구나' 싶게 됩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일부' '인류'(!)가 아침마다―아침나절, 점심·저녁나절, 밤에 마시는 커피도 얘기해야 하겠지만―한두 잔 커피를 마시며 하는 생각들을 다 모은다면 얼마나 많은 양일지, 그걸 생각하면 아득한 느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걸 마시며 하는 각오나 다짐,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해 떠올리는 아이디어, 시인의 메모,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한 구상, 수필·시나리오·희곡,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아마도 신비스러울 상념, 그림이나 디자인의 소재, 이럴 것 없이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전문가들이 커피를 마시는 시간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말없는 그리움, 기차나 비행기, 고속버스 혹은 전철을 타고 가게 된 곳에 대한 기대…… 이건 뭐 이런 식으로 늘어놓다가는 날이 새겠습니다. 차라리 이만큼에서 아주 많이 열거했다고 생각하기로 하고 말겠습니다.

 

 

    3

 

  저 커피숍 벽에 적힌 것처럼 커피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날 그 커피의 정령(精靈)이 여기 이 앞에 나타나서 "그동안 나로 인해서 떠올린 생각들의 목록 좀 보여달라!" 하면 뭐라고 해야 좋을지…… 난데없이 이제 그걸 다 돌려달라거나 돈으로 쳐서 갚으라고 하면 또 뭐라고 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산전수전 다 겪었으므로 돈이 없을 때처럼 "내게는 내어줄 것이 있을 리 없다"고 뜨악한 표정을 지을 수는 있지만 사실은 적지 않은 기억들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학교 교사였을 때, 유독 할 일이 많던 나는 걸핏하면 교장실 바로 옆 보건실에 들어가 "이러다가 내가 죽겠다!"며 보건 선생님을 괴롭혔습니다. 그럼 그 선생님은 무슨 조치와 함께 커피도 한 잔 주었는데 거기에는 그분의 미소가 어려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돌려주지 않을 작정입니다. 나도 아침 커피를 준비하고 그런 미소를 덧붙여 주었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쉬움은 어느 날 아내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아무래도 한 잔 마시는 게 더 나을 것 같긴 한데…… 어쩌고 저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