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2.
1
2004년 9월, 정년이 5년 반밖에 남지 않았을 때 교장이 되어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학교는 조용했고 여전히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정겨운 곳이었습니다.
아침에 교장실에 들어서면 귀뚜라미가 울었습니다.
"잡아버릴까요?"
그게 신기해서 얘기했더니 기사1가 듣고 대들다시피 해서 기겁을 했습니다. 나는 귀뚜라미가 우는 교장실이 참 좋다고 했고 그 귀뚜라미와 친하게 지내겠다고 했습니다.
교장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엄수'하는 분위기였을까요?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고 했습니다. 귀뚜라미를 잡아버리고 싶으면 그건 내 방이니까 잡아도 내가 잡겠다고 했고, 서로 친하게나 지내자고 했습니다.
2
나는 일제고사를 보게 되면 시험지를 인쇄하기 전에 1학년에서 6학년까지의 문제를 모두 풀어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문제를 고치는 게 좋겠다 싶으면 붉은 글씨로 메모를 해주었습니다. 맨 처음 일제고사 때 수십 장의 시험지를 내놓고 여러 선생님께 손질 좀 부탁해달라고 하자 그 메모를 본 교감과 행정실장이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 "감동"이라고 해서 "이까짓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 앞으로는 정말 감동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그 기사도 들었겠지요? 시험지 인쇄는 기사의 몫이었거든요. 어느 날 그의 자녀가 시험 본 얘기를 했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쟁반에 음식을 담아 가지고 우리 집에 왔습니다. 어떻게 인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의 아들은 이렇게 썼더랍니다. "뭐 이런 걸 다."
나는 웃고 나서 그 답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틀렸지요."
"왜요?"
"'아주머니, 감사합니다!'라고 썼어야 하니까요."
3
별 것도 아닌 이야기인데 최근까지 걸핏하면 "뭐 이런 걸 다……"라는 대답을 상기하면서 혼자 미소를 짓곤 했습니다. "뭐 이까짓 걸 다 가지고 오셨습니까?" "뭐 이런 걸 다 선물이라고……"처럼 들리는 그 인사는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는지 몰라도 그동안 사용되고 있었던 인사 아닙니까?
실제로는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이렇게 귀한 걸 주시는군요."
4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때 그 기사는 자신의 자녀가 쓴 답이 정답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싶다는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 우리 학교 시험지를 그렇게 다 풀어보고 모범답안도 검토하고 하는 걸 보니까 뭘 좀 아시는 것 같은데 제 아들이 쓴 답이 정말 오답일까요? 오답이어야 할까요?")
어언 15년 전에 있었던 일이니, 이제 와서 그 얘기를 꺼내면 뭘 하겠습니까?
"아이고~ 일찍도 깨달았네요! 내 아들은 이미 대학교 4학년인걸요."
그렇게 나오면 내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어쩌면 그 정도는 그래도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사실은 좀 둔하거든요." 하면 될 테니까요. 자칫하면 그가 이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지도 모릅니다.
'이 양반 봐라. 독판 똑똑한 척하더니 마침내 치매를 앓게 되었구나! 아,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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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자동차를 직업적으로 운전하는 사람 (2) 전문적 기능을 가지고 있거나, 특정한 기계를 다루는 기술이 있는 사람 (3) 이전에, 국가 기술직 공무원의 관명의 하나를 이르던 말 사전에서 찾아본 이 말의 뜻입니다. 아마도 2 아니면 3의 뜻이었을텐데, 그 이전에는 '청부' '소사' '급사'로 불린 사람들도 있었고, 오늘날에는 아마도 모두 '주무관'이라는 호칭이 쓰이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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