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구운몽》
문학과지성사 1996(3판12쇄)
민.
얼마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입니까? 저를 너무 꾸짖지 마세요. 지금의 저는 민을 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돌아오는 일요일 아세아극장 앞 '미궁' 다방에서 기다리겠어요. 1시에서 1시 30분까지. 모든 얘기 만나서 드리기로 하고 이만. 민, 꼭 오셔야 해요.(195)
사라졌던 연인이 남긴 편지를 읽으면서부터 민은 끝없는 '미궁'을 헤맨다. 그를 쫓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 '여로'가 김만중의 『구운몽』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 '서사시'는 사랑이 주제다.
몽환적이다.
그게 참 좋아서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시작된다.
관(棺) 속에 누워 있다. 미이라. 관 속은 태(胎) 집보다 어둡다. 그리고 춥다. 그는 하릴없이 뻔히 눈을 뜨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몸을 비틀어 돌아눕는다. 벌써 얼마를 소리 없이 기다려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몇 해가 되는지 혹은 몇 시간인지 벌써 가리지 못한다. 혹은 몇 분밖에 안 된 것인지도 모른다. 똑똑. 누군가가 관 뚜껑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요? 저예요. 누구? 제 목소릴 잊으셨나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 많이 귀에 익은 목소리. 빨리 나오세요. 그 좁은 곳이 그렇게 좋으세요? 그리고 춥지요? 빨리 나오세요. 따뜻한 데로 가요. 저하고 같이. 그는 두 손바닥으로 관 뚜껑을 밀어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게 누구요? 대답이 없다. 그는 몸을 일으켜 관에서 걸어나왔다. 캄캄하다. 두 팔을 한껏 앞으로 뻗치고 한 발씩 걸음을 떼놓는다. 한참 걸으니 동굴 어귀처럼 희미한 곳으로 나선다. 계단이 있다. 두리번거리면서 한 계단 밟아 올라간다. 캄캄한 겨울 밤 독고 민은 아파특 계단을 올라간다. 지난밤 꿈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그는 잠시 망설인다. 꼭 한 잔만 했으면. 후끈하게 몸이 녹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어쩐지 오늘따라 춥고 허전함이 사무친다. 지붕 양철이 날카롭게 운다. 양력 정월 그믐께 한창 고비로 설치는 모진 바람에 싸구려로 지은 나무집이 늙은 쥐덫에 낀 소리를 낸다. 그는 목을 움츠리면서 부르르 떨었다. 다시 현관으로 나가 길 건너 골목을 빠져…… 바람이 에듯 휘몰아치는 거리를 지나 술집까지 나갈 맘이 싹 가시면서 민은 불 없는 캄캄한 계단을 간신히 기어올라 이층 자기 방문 앞에 다다랐다.(193)
『광장』과 이 작품 중에서 한 번 더 읽으라면 단연코 이 작품을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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