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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최인훈 《구운몽》

by 답설재 2018. 11. 28.

최인훈 《구운몽》

문학과지성사 1996(3판12쇄)

 

 

 

 

 

 

 

민.

얼마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입니까? 저를 너무 꾸짖지 마세요. 지금의 저는 민을 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돌아오는 일요일 아세아극장 앞 '미궁' 다방에서 기다리겠어요. 1시에서 1시 30분까지. 모든 얘기 만나서 드리기로 하고 이만. 민, 꼭 오셔야 해요.(195)

 

사라졌던 연인이 남긴 편지를 읽으면서부터 민은 끝없는 '미궁'을 헤맨다. 그를 쫓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 '여로'가 김만중의 『구운몽』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니까 이 '서사시'는 사랑이 주제다.

 

몽환적이다.

그게 참 좋아서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시작된다.

 

관(棺) 속에 누워 있다. 미이라. 관 속은 태(胎) 집보다 어둡다. 그리고 춥다. 그는 하릴없이 뻔히 눈을 뜨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몸을 비틀어 돌아눕는다. 벌써 얼마를 소리 없이 기다려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몇 해가 되는지 혹은 몇 시간인지 벌써 가리지 못한다. 혹은 몇 분밖에 안 된 것인지도 모른다. 똑똑. 누군가가 관 뚜껑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요? 저예요. 누구? 제 목소릴 잊으셨나요.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 많이 귀에 익은 목소리. 빨리 나오세요. 그 좁은 곳이 그렇게 좋으세요? 그리고 춥지요? 빨리 나오세요. 따뜻한 데로 가요. 저하고 같이. 그는 두 손바닥으로 관 뚜껑을 밀어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게 누구요? 대답이 없다. 그는 몸을 일으켜 관에서 걸어나왔다. 캄캄하다. 두 팔을 한껏 앞으로 뻗치고 한 발씩 걸음을 떼놓는다. 한참 걸으니 동굴 어귀처럼 희미한 곳으로 나선다. 계단이 있다. 두리번거리면서 한 계단 밟아 올라간다. 캄캄한 겨울 밤 독고 민은 아파특 계단을 올라간다. 지난밤 꿈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그는 잠시 망설인다. 꼭 한 잔만 했으면. 후끈하게 몸이 녹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어쩐지 오늘따라 춥고 허전함이 사무친다. 지붕 양철이 날카롭게 운다. 양력 정월 그믐께 한창 고비로 설치는 모진 바람에 싸구려로 지은 나무집이 늙은 쥐덫에 낀 소리를 낸다. 그는 목을 움츠리면서 부르르 떨었다. 다시 현관으로 나가 길 건너 골목을 빠져…… 바람이 에듯 휘몰아치는 거리를 지나 술집까지 나갈 맘이 싹 가시면서 민은 불 없는 캄캄한 계단을 간신히 기어올라 이층 자기 방문 앞에 다다랐다.(193)

 

『광장』과 이 작품 중에서 한 번 더 읽으라면 단연코 이 작품을 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