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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어떤 교재·교과서가 필요한가? (2018.6.21)

by 답설재 2018. 6. 20.

 

   2018.4.28.

 

                                                                                           

 

 

녹말가루에 요오드 용액을 섞으면 보라색으로 변한다고 했다. 풋내기 교사는 녹말가루와 요오드 용액, 스포이트, 샬레만 준비하면 가능한 실험으로 즐거운 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 생각만 해도 행복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실험인데도 마치 교사가 요술을 부려주는 것처럼 신기해하는 것도 좋지만 일 년 내내 실험실 근처에도 가지 않는 한 선배 교사가 "왜 혼자서 그따위 짓을 하느냐?"고 빈정댈 때마다 '이 아이들 중에서 과학자가 수두룩하게 나오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남모르는 각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복이란 본래 쉽사리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인지, 간단한 그 실험을 모임별로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녹말은 거무튀튀해지기만 할 뿐 끝내 그 보라색을 보여주지 않아서 미리 참고서를 봐둔 한 성급한 아이는 시험지엔 보라색을 쓰면 되는지 그것만 말하라고 분통을 터뜨렸고, 빈둥빈둥 놀면서 '녹말+요오드=보라색'만 암기시키고 있을 선배 교사가 떠올라 교사도 분통이 터졌다.

 

50년 전쯤의 일이었다. 교과서가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제 구실을 못했을 뿐이었다. 무엇인가 시시콜콜 설명하고 있었을 것이고, 교과서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풋내기 교사는 마침내 그런 교과서가 왜 필요한지 기회 있을 때마다 물었고 그동안 들은 얘기 중 가장 솔깃한 대답으로는, 교과서는 최소한 그 정도는 가르치고 알아두어야 할 기준이 되어 이로써 전국적인 수준을 확보․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대답을 뒷받침하는 현상도 분명하였다. 시범수업을 하는 교실, 수업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교실에서 교과서대로 가르치는 교사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같이 교육과정을 준거로 창의적이고 다양한 활동을 자유롭게 전개할 뿐이어서 교과서의 내용을 파악하고 암기시키는 수업, 교과서에 의존하는 수업은 보이지 않았고 차라리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밑줄 쫘~악!"은 매양 횡행하면서도 일찌감치 우스개로 전락하였고, 20세기에 이미 '20세기형 수업'이라고 비난받았다.

 

그러므로 "교과서란 전국적인 수준을 확보·유지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공식은 진작 사라졌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세계적 수준인 우리나라 교사들 중 몇 명이 교과서를 그대로 읽고 쓰고 암기하는 방법이 아니면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할까? 겨우 그 몇몇 교사들을 위해서 단일본의 교과서(국정), 혹은 출판사별로 각각 다른 여러 교과서가 엄격한 심사를 거쳐 나와 봤자 "그게 그거여서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나 듣는 교과서(검정)를 굳이 만들어야 할까?

 

교재의 다양성을 주장하지만 그건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 측에서만 다양할 뿐 한 권의 책만 갖게 되는 학생들로서는 어떤 다양성이 확보되는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인정' 교과서도 있긴 하다. 이미 발행된 책을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고자 할 때 교과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방법이지만(국난극복을 배운다면 "난중일기"나 "징비록" 등등) 우리나라는 교육부에서 심사하면 '검정', 시·도교육청에서 심사하면 '인정'으로 구분할 뿐이어서 검정 교과서와 다른 특징을 찾기가 어렵다.

 

1980년대에 이미 "온 세상이 교과서"라는 주장도 나왔지만 진리·진실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정부나 학자들이 나서서 가르쳐주고 싶어 할 이유도 소멸되었다. 그러한 선행(善行)이 갖는 권위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는데도 아직도 그 권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교육자가 적진 않지만 이제 드러내놓고 혹은 자랑스럽게 그러지는 못하는 듯하다.

 

최근 몇몇 교육청과 교육부에서 교과서 발행 체제 개선 방안으로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논의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혹 교육부도 출판사도 '자유발행'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제도를 도입하면 교육부와 출판사의 할일은 늘어나게 되므로 관련 업무는 확대·강화되어야 하고 출판사는 활기를 띠게 된다. 교과서 질이 떨어지거나 엉뚱한 내용을 넣을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학교나 출판사나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고, '쓰레기'를 걸러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공염불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