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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병원 다니기

by 답설재 2018. 3. 13.






병원 다니기










    1


  삭막해 보여도 잎이 돋기 시작하면 금방입니다. 한두 해 겪은 것이 아닙니다. 저 가지들을 보고 있으면 더디고 답답할지 모르지만 다음에 병원에 가서 보면 '언제 저렇게 됐나!' 싶을 정도로 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 시간과 함께 예약된 과를 찾아다니며 몇 달씩 유예를 받습니다(가령 "육개월 후에 봅시다!"). 심각한 부위에 대해 받는 유예는 마음을 가볍고 밝게 해줍니다. '나는 유예를 받으며 살아가는구나' '병원에서 유예를 받으며 살아가게 되다니……' 싶긴 하지만 그때까지는 마음 놓고 혹은 즐겁게 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그렇지만 그렇게 유예를 받는 데는 돈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곳저곳 탈이 나는 부위가 늘어나면 돈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고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 늘어납니다. 그게 걱정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의사가 뭐라고 하든 치과는 그만둘까?' '내분비내과는 그만둘까?' 같은 아이디어입니다. 그만둔다고 해서 당장 덜컥 죽어나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치과 의자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무슨 급하거나 긴요한 일로 조바심을 내고 그래야 하는 입장은 아니라 해도 이렇게 멀쩡한 날 내가 이거 뭐하는 짓이지?'

  '이렇게 입을 벌리고 있는 걸 싫어하면서도 돈 내고 시간 죽이고…….'

  '내가 오지 않는다고 의료진이 경찰을 동원해서 날 잡으러 올 건 아니지 않은가?'


  온갖 생각들을 하면서도 불과 몇 달 전 이가 아파 그렇게 고생한 시간들은 떠올리지도 않았습니다. 고통스럽긴 해도 그 고통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되진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생각했더라면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치아가 고장 난 것으로 나에게 사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유예 기간을 주고말고 할 건 아니지 않은가?'



    3


  유예고 뭐고 이런 생각은 일단 그만두겠습니다.

  다른 생각할 일이 좀 있고, 이 생각은 다음다음 주에 또 병원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 더 생각해도 충분합니다.

  그때에는 저 가지들을 내다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르긴 하지만 이렇게 지내는 것이 즐겁거나 유쾌하거나 다행스럽다거나 하진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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