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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이언 매큐언 《속죄》

by 답설재 2017. 12. 21.

이언 매큐언 Ian McEwan 장편소설

《속죄 Atonement

한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5

 

 

 

 

 

 

 

 

 

1

 

"담배 다 젖겠다. 꽃이나 뽑아서 들고 있어."

로비는 갑자기 남자의 힘과 권위를 자랑하고 싶어진 듯 사뭇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세실리아로 하여금 꽃병을 쥐고 있는 두 손에 더 힘들 주게 만들 뿐이었다. 그녀는 꽃을 꽂은 채로 꽃병을 물에 담는 것이 자기가 바라는 자연스러운 꽃꽂이에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을 설명할 시간도 없었고, 또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몸을 비틀어 로비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꽃병 주둥이의 한 부분이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듯 툭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더니, 두 개의 삼각형으로 쪼개져 물 속으로 떨어졌다. 두 개의 도자기 조각은 천천히 오락가락하며 출렁이는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조각난 햇빛에 비틀거리면서 서로 몇 인치 떨어진 곳에 내려앉았다.

세실리아와 로비는 몸싸움이 낳은 결과에 놀라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이윽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세실리아는 초록색과 오렌지색이 불쾌하게 섞여 있는 그의 눈동자에서 충격이나 죄책감이 아닌 도전, 심지어 승리의 기쁨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맞닥뜨리기 전에 그녀는 일단 부서진 꽃병을 계단 위에 내려놓았다. 대결을 피할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리고 사태가 심각하면 할수록 로비에게는 더욱더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감미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죽은 삼촌, 아버지의 사랑하는 동생, 그 끔찍했던 전쟁, 위험을 무릅쓴 도강(渡江), 돈을 넘어서는 가치, 영웅적인 행동과 선함, 위대한 회롤트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꽃병의 역사, 회롤트를 넘어 도자기를 재창조한 그 은둔자들의 장인정신과 예술혼…….

"이 멍청아!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봐."

로비는 물 속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 손을 들어 입을 막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행동으로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걸 보여주려 했지만, 그 순간 세실리아는 고개를 흔드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분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순간 그는 그녀가 뒷걸음질을 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꽃병에 부딪히게 될 텐데. 그는 말없이 손을 들어 꽃병을 가리켰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틀 전에는 우리집에 와서 신발과 양말을 벗었지. 흥,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줄 때였다. 세실리아는 샌들을 벗어던지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벗어버리고, 치마를 벗어던진 후, 분수 쪽으로 걸어갔다. 로비는 두 손을 엉덩이에 댄 채 서서, 그녀가 속옷 바람으로 분수대 난간으로 올라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

몇 초 후 세실리아가 도자기 조각을 하나씩 양손에 들고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로비는 그녀가 물 속에서 나오는 것을 돕겠다고 손을 내밀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이 연약하고 하얀 요정은 물 속에서 주워온 조각들을 꽃병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물은 건장한 트리톤보다 오히려 이 작은 요정의 몸에서 더 시원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팔을 실크 블라우스의 소매 속으로 억지로 끼워넣으려 했고 (…) (51~53)

 

 

이 미묘한 상황이, 돌연 죽음 아니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이유가 없는 불꽃같은 사랑의 사연이 되고, 하등의 흠결 없는 연인들이 되어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장면을 세실리아의 여동생, 열세 살의 브리오니가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비천한 파출부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브리오니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나온 로비 터너가, 정원사가 되려고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의대 진학을 생각중이라는 바로 그 로비 터너가 용감하게도 세실리아에게 구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제대로 된 장면이었다. 신분의 경계를 넘어선 이런 도약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낭만적인 연애 이야기 거리가 아닌가.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로비가 오만하게 손을 들고 뭐라고 명령을 내리고 세실리아는 그 말에 순순히 복종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저항하지 못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세실리아는 로비의 명령에 따라 재빠르게 옷을 벗고 있었다. 블라우스를 벗는가 했더니 곧이어 치마도 땅에 떨어졌고, 이어서 속옷만 입은 세실리아가 사뿐히 걷기 시작했으며, 로비는 뒷짐을 진 채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언니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그의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공갈을 했을까? 아니면 협박? 브리오니는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며 창가에서 조금 물러섰다. 눈을 감아야 한다고, 그렇게 하여 언니가 모욕을 당하는 장면을 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다행히 속옷은 벗지 않은 세실리아가 분수대 연못 속으로 들어가 허리까지 차는 물 속에 서 있더니 곧 이어 코를 쥐고 물 깊숙이 사라졌다. 이제는 로비와, 자갈 위에 벗어놓은 세실리아의 옷과, 그 너머 고요한 정원과, 저 멀리 있는 푸른 언덕만이 눈에 들어왔다.(64)

 

 

2

 

 

전혀 딴판입니다. 감수성 강하고 은밀한 걸 즐기고 장차 소설가가 되려는 소녀 브리오니가 본 이 '진실'은 언니 세실리아와 '남친' 로비를 파멸시켜버리는 계기가 됩니다. 동갑내기 소녀 사촌 롤라를 강간한 것은 오빠 레온의 친구 폴 마셜인데 그 범인이 로비라고 진술해버린 것입니다.

 

이 소설은 그 브리오니가 1935년으로부터 64년이 지나 일흔일곱 살이 되었을 때 두 연인에게 속죄하는 고백록이었습니다. 누명을 쓴 로비는 3년 6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영국군이 독일군에게 쫓기는 프랑스 전선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 세실리아에게 돌아간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기다릴게. 돌아와.") 그건 고백록을 쓴 브리오니의 미안한 마음을 나타낸 소설일 뿐, 사실은 1940년 6월 1일 로비는 패혈증으로 죽고, 그해 9월 밸엄 지하철역 폭격으로 세실리아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3

 

 

두 연인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도 물론 소설입니다. 그러나 기가 막히는 것은 강간을 한 마셜, 강간을 당한 롤라는 모른 척 결혼을 해서 오래오래 윤택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명의 관리들과 박물관장 그리고 사진사 한 명이 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마셜 부부가 기둥 옆에 있는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청년 둘이 그들을 위해 우산을 받쳐들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어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고, 걷는 속도만 늦추었다. 서로 돌아가면서 악수를 하더니, 마셜 경이 무슨 말을 하자 모두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라커 칠을 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박물관장과 함께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나서 정장 차림에 우산을 든 청년들의 수행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왔다.(500~501)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거짓 증언으로 언니와 그의 연인 두 사람을 파멸시키고도 오래오래 살아남아 이 고백록을 쓴 브리오니의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4

 

 

매우 고전적인 문체의 소설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지금 이 답답한 이야기를 읽고 있어야 하나' 싶었습니다. 더구나 꼭 절반인 제1부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인데 어느 순간!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변했습니다.

 

앞 면지 한 페이지에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수도원』에서 옮긴 글이 있었습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몰란드 양, 당신이 품어온 의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해보세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겁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와 이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