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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주위에서 보는 미국 노인들에게서, 노인이라고 내세우는 것 같은 유난스러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유난스러웠다면 오히려 대하기의 편안함이 그랬다. 그래선지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 기분 좋아질 정도로 깍듯한 것 같다. 나이 들면서 언제부턴가 느릿느릿 걸어야 하면 그냥 그렇게 걸으면 되는 것뿐이다. 마치 다 산 것처럼 행세하는 노인도 못 봤다. 일을 계속하고 싶고 그럴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그냥 쉬고 싶으면 쉬고, 자원봉사도 하고들 그런다. (…)"
《Denver Post》(2017.6.26)의 기사 "Colorado postman’s 60-year tenure on a long, rural route filled with wonder"를 소개한 블로그 《삶의 재미》의 글을 읽었다.(☞ http://blog.daum.net/dslee/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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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건 날이 갈수록 어렵다. 우선 간단하지 않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공자)" 같은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멀다.
끔찍하였다. 인용문의 저 몇 마디가 나 보라고 하는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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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에서 찰스 부카우스키는 이렇게 썼다.1
경마장에 나가 있으면 시간이 정말 죽어나간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오늘, 두 번째 경주에 나서려고 그들이 출발대로 다가가고 있었다. 아직 3분이 남았기에 말들과 기수들은 느릿느릿 다가가고 있었다. 무슨 까닭인진 몰라도 내게는 괴롭도록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70대가 되고 보면 누가 내 시간을 마구 다루는 게 예전보다 더 속상하다. 물론, 그런 입장을 자초했다는 걸 난 잘 안다.
누가 내 시간을 마구 다루는 게 느껴지면 나도 참 속상하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자초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더욱 약이 오른다. 가령 문인으로 등단한 사람은 내가 장기간 그의 글을 읽어주었어도 절대로 비문인(非文人)인 내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내가 혹 잘못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긴 하다. 내 시간을 마구 다루는 게 느껴지는 건 주로 이 블로그에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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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인이 내 이름을 언급한다고 해서 무슨 수가 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늙음과 질병, 죽음…… 같은 것에 대해 어떤 글을 써놓으면 꼭 덤벼드는 사람이 생기는 건? 그들은 "어린애처럼 그러지 말고 즐겁게 지내라. 너만 늙는 건 아니다." "내 곁으로 오라. 좋은 수가 있다." 혹은 "내 글의 맞춤법2이 당신의 파란편지만큼 정확하지 않은 건 이상하다. 억울하다"…… 는 식이다.
그럴 때 나는 꼭 직설적이다.
"당신도 나만큼 살아보라!(그러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열심히 한 게 그나마 맞춤법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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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찰스 부카우스키는 이렇게도 썼다.
어찌 됐든 내겐 염병할 경마가 있다. 난 언제라도 경마에 관해, 그 거대한 정체불명의 빈 구멍에 관해 쓸 태세가 돼 있다. 내가 거기 가는 건 나 자신을 희생물 삼고, 시간의 사지를 잘라내고 죽이기 위해서다. 시간을 죽여야만 한다. 기다리는 동안, 완벽한 시간은 이 기계 앞에 앉아 있을 때다. 그러나 불만족스러운 시간이 없인 완벽한 시간도 얻을 수 없다. 열 시간을 죽여야만 두 시간을 살릴 수 있으니까 주의해야 할 게 있다. 시간을 모두 다, 세월을 모두 다 죽이면 안 된다.3
찰스 부카우스키도 덴버의 저 집배원을 훌륭하다고 할 것은 분명하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이유를 짐작하고 설명하는 건 간단한 작업이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무엇보다 부카우스키 자신도 '두 시간'을 위해 '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 '두 시간'마저 내어줄 수는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삶의 재미』의 저 글을 세심하게 읽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