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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나중에" "나중에"

by 답설재 2017. 6. 27.

 

 

 

"내가 그런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아니?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시간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박사학위를 받고 나면 박사후과정을 해야 하고 논문을 써서 명성을 쌓아야 하지. 그러면 '대학에서 종신직을 보장받고 나면 시간이 있을 거야.'라고 또 얘기하지. 그런데 종신직을 받고 나면 독자적인 실험실을 운영해야 하고, 세미나와 위원회에 참석해야 하고 학과 내에서 정치까지 해야지. 마지막엔 이렇게 생각하지. '퇴직하면 시간이 있을 거야.' 그런데 퇴직할 때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나면 하고 싶었던 게 뭔지 기억조차 못해. 그리고 내 말을 들어봐. 이 사람들 대부분은 5시 반에 집에 와서는 6시 반이면 실험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식탁에 왜 스테이크가 차려져있지 않냐고 부인에게 화를 내지. 나 역시 아내와 원하는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진 못해.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릴 수는 있어. 우리는 여전히 함께 있는 것을 즐기지."

 

 

예일대 물리학과에 재학 중이던 아일린 폴락(Eileen Pollack)이 구내식당에서 젊은 헝가리 사람인 피터 네메티(Peter Nemethy) 이론물리학 교수와 식사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네메티 교수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서두르니? 너는 물리학 이외에는 하고 싶은 게 없니?"

"글쎄요, 전 테니스 치는 걸 좋아하고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해요. 그렇지만 그런 건 졸업하고 나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일린 폴락의 대답을 들은 네메티 교수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아니? (…) 우리는 여전히 함께 있는 것을 즐기지."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병이 들었고, 함께 있는 것을 즐기기는커녕 함께 있었던 기억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공부를 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세월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난 것도 있습니다. 정말로 심각한 일이 다가오면 '그 일만 처리하고 난 뒤이면 어떤 상황이 되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뚜렷한 건 어쩌면 그 기억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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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붉은 글씨의 글은 아일린 폴락이 쓴 『평행 우주 속의 소녀 The only Woman in the Room』(한국여성과총 옮김, 이새, 2015, 180)에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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