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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책 소개

by 답설재 2017. 5. 2.

『롤리타』, 바라보는 순간 왠지 '심각한 표정'으로 보인 장정.

 (심각한(!) 책이긴 하지만……)

 

 

 

1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이라는 책에서 죽음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을 쓴 줄리언 반스는 자신의 조부(교장)에 관한 일화들도 재미있게 소개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 버트 스콜토크는 남들에게 들려줄 만한 우스갯소리가 딱 두 개밖에 없었다.1 하나는 1914년 8월 4일에 있었던 당신의 결혼식에 얽힌 이야기라서, 반세기 동안 (갈고 다듬어지지 않은 채) 반복해 듣게 되었다.

"우린 전쟁이 터진 날에 결혼했어. (부담스럽게 뜸을 들인 후) 그다음부터는 전쟁 같은 부부 생활이 이어졌지!!!"

다른 이야기는 카페에 들어가 소시지롤을 달라고 했던 녀석에 관한 이야기로, 할아버지는 한껏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 녀석은 한 입 먹고 나선 빵 안에 소시지가 없다고 구시렁댔다.

"더 먹어야 소시지가 나와요."

카페 주인이 말했다. 그 녀석은 이번엔 한 입 가득 베어 물고선 똑같이 구시렁댔다.

"방금 통째로 다 삼켰네요."

카페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이 대답은 당시 할아버지가 즐겨 반복했던 회심의 표현이기도 했다.)2

 

위의 이야기는 '책 소개'에 관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옮겨놓은 것은, 줄리언 반스가 글을 참 재미있게 썼다는 것부터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이 책 소개에 관한 내용입니다.

 

 

2

 

매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와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할아버지가 60대 초반이었을 때, 어느 날 읽을거리를 찾아 내 침실의 서가까지 왔다가, 내겐 묻지도 않고 『롤리타』를 가져가버린 일이 있었다. (…) 나는 할아버지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내 허리의 불꽃'부터 '소년들이 이렉터 세트를 갖고 놀 나이'3까지) 혐오감에 못 이겨 책을 집어던질 거라고 예상했다. 놀랍게도, 할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일단 시작한 마당에 끝까지 읽을 작정이었다. 영국 청교도주의에 끌려 그는 러시아인이 말하는 타락한 미국 이야기를 끝까지 집요하게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초조한 심정으로 할아버지를 지켜보는 동안, 나는 내가 그 책을 쓴 것 같은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고, 그런 후엔 어린 여자애를 추행하다 들킨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그것 말고 달리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할아버지는 내게 수직으로 아문 상처들로 책등이 엉망이 되어버린 책을 돌려주며 이런 논평을 덧붙였다.4

 

"나는 내가 그 책을 쓴 것 같은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고, 그런 후엔 어린 여자애를 추행하다 들킨 것 같았다."

『롤리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십 중 팔구' 그렇게 생각할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마치 아들이나 딸과 함께 좀 외설적인 장면이 보이는 드라마가 방송되는 TV 앞에 앉아 있을 때처럼…… 그럴 때 나는 그 장면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걸 가장하면서도 주제넘게도 내가 그 드라마 작가이기나 한 느낌을 갖지만 나와 함께 앉아 있는 그 아들이나 딸도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죠.

 

아, 이런!

할아버지의 논평이 이어집니다.

논평은 좀 고답적이지만, 그 논평에 따르는 줄리언 반스의 생각은 그야말로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좋은 문학작품인지 모르지만, 난 외설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혼자서 히죽히죽 웃었고, 옥스퍼드에 가게 될 유미주의자들도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에게 한 가지 몹쓸 짓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할아버지는 『롤리타』가 내 관심을 끈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과 외설물의 활력 넘치는 조합이었다.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에 대한―경험은커녕―정보도 부족해서 르나르의 개정판―'섹스와 마주할 때 우리는 어느 때보다 책에 의지하게 된다'―이 돌아다니는 지경이었으니) 난 그 전에도 할아버지에게 몹쓸 짓을 했으니 당신의 유서에서 내겐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형 말로는 나의 착각이란다.5

 

 

3

 

퇴임 순간부터는 갖고 있는 물건들을 버리며 지냈습니다. 그래 봤자 버린 게 별로 없긴 합니다. 쑥스럽지만 가진 게 보잘것없어서 그렇습니다. 내일이 마지막이라면 당장 옷가지와 이불, 가방 몇 점이 생각날 뿐입니다.

그렇지만 책은 반 넘게 버렸는데도 몇 천 권은 남았습니다. 나중에 아들이 보면 '뭐 이따위 책을 다 봤을까?' 싶거나 '이런 부분에 밑줄을 친 이유가 뭘까?' 싶을 책이 고스란히 꽂혀 있습니다. 그런 책을 읽고, 그런 밑줄을 칠 당시에는 '이런 건 나중에…….' 하고 유보적이었지만, 글쎄요, 그건 가능성으로 봐서는 아주 무책임한 유보였고, 아예 포기하는 게 마음 편할 것입니다.

차라리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아이큐 50 내 동생, 조반니』라는 책에서 본 장면입니다.6

 

엄마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집 어디에나 책이 있었다. 거실의 탁자 위에, 주방에, 창턱에, 심지어 욕실에도, 침대 머리맡의 조그만 책상은 쌓여 가는 소설책의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질 지경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헤르만 헤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조지 오웰 같은 이름은 내게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일곱 살의 나는 책등의 두께, 책 표지의 색깔, 본문에 숫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 정도밖에 구별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항상 책에 끌렸다. 책을 향한 사랑은 부모에게서 아이에게로 전해지고, 그 밖에도 공기와 음식 속에서 전해진다고 믿는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우연한 기회에 엄마가 가까이 두고 보았던 책들 몇 권을 종종 손에 넣었다. 책을 읽었다기보다는 제목을 더듬더듬 말하고 종이를 손가락으로 훑거나 가끔 냄새를 맡았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4

 

이제 남에게 읽을 만하다고 한 책들이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권한 건 기억나는 경우가 별로 없어 다행이고 다만 이 블로그에 실은 글들이 문제입니다.

좋은 책 소개 혹은 서평 식으로 글을 쓰다가 '독서일기'쯤으로 바꾼 것만은 다행이고 요즘 나온 책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도 다행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이 블로그를 이대로 두는 한 문제는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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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가지 우스갯소리는 '책 소개' 하고는 관계가 전혀 없지만 짧고도 재미있는 내용이어서 소개합니다.
2. 줄리언 반스 지금, 최세희 옮김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다산책방, 2016), 373쪽.
3. 『롤리타』에 등장하는 시의 한 구절로, 여기서 '이렉터'는 너트와 볼트로 이을 수 있게 구멍이 뚫린 금속봉 놀이 세트를 지칭하지만, 동시에 '발기하는 근육'을 암시하기도 한다.(김진준 역 참조) : 이 책 374쪽 각주.
4. 이 책 374쪽.
5. 이 책 375쪽.
6. 자코모 마차리올 지음, 임희연 옮김, 『아이큐 50 내 동생, 조반니』(걷는나무, 2016), 5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