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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백 가지 슬픔의 문〉

by 답설재 2017. 4. 27.

《백 가지 슬픔의 문》

 The Gate of the Hundred Sorrows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이종인 옮김, 『현대문학』 2017년 3월호 114~123

 

 

 

 

 

 

 

풍칭은 왜 그 집을 "백 가지 슬픔의 문"이라고 불렀는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았다(그는 내가 아는 한 발음하기 어려운 괴상한 이름을 사용하는 유일한 중국인이었다. 대부분의 이름들은 화려했다. 이것은 캘커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화려한 이름들을 직접 확인하곤 했다.1

 

아편 파이프를 석 대 피우고 나면 베개의 용들이 서로 움직이면서 싸우기 시작한다. 나는 수많은 밤 동안에 그 싸움을 구경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연기 양을 조정했고, 이제 열두 대를 피워야 용들이 움직인다. 게다가 이 파이프들은 매트와 마찬가지로 찢어지고 더러워졌으며, 풍칭 노인은 죽었다. 그는 이태 전에 죽었는데 내게 파이프를 하나 남겼다. 나는 언제나 그놈을 사용한다. 2

 

그가 죽자 조카 친링이 그 집을 인수하고 그곳을 삼유당三有堂이라고 불렀으나, 우리는 언제나 그곳을 백수당百愁堂(백 가지 슬픔의 문)이라고 불렀다. 조카는 일을 아주 엉성하게 하기 때문에 멤사히브3가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과거에 노인과 살았던 것처럼 지금은 그 조카와 산다. 두 사람은 온갖 종류의 천한 사람들과 깜둥이들을 들이고 있고 또 검은 연기는 예전처럼 좋지가 않다.4

 

나는 시장 여자 5처럼 죽고 싶다. 깨끗하고 시원한 매트 위에서 좋은 물건이 담긴 파이프를 입에 문 채로. 나는 갈 때가 되었다고 느끼면, 친링에게 이런 물건들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달마다 나오는 나의 60루피를 따박따박 인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물건들이 오면 나는 조용하고 편안하게 등을 대고 누워서 검은 용과 붉은 용들이 최후의 대전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리라. 그다음에는…….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내게는 그 어떤 것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지 친링이 검은 연기 속에다 겨를 집어넣지 않았으면 좋겠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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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1865년 12월 30일 인도 봄베이에서 예술학 교사 아버지와 삽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1871년 영국으로 보내졌으나 188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도의 가족과 합류. 라호르의 『민간 및 군인 가제트』의 하급 기자로 활약함. 키플링의 초기 시와 단편소설은 대부분 현지의 신문들이나 인도 철도 라이브러리에 발표되었음. 1887년 단편집 『언덕으로부터의 평범한 이야기들』을 봄베이와 런던에서 출간. 1889년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중국, 일본, 미국 등을 여행. 영국에 도착하여 런던의 채링 크로스에 자리를 잡고 초창기 문학적 성공을 거둠. 결혼 후 1894년 『정글북』 출간. 보어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시를 발표. 이후 남아프리카와 영국에서 지내며 장편소설 『킴』, 소설집 『그냥 그런 이야기들』 『차량들과 발견 사항들』 등 출간. 1907년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 1915년 1차 대전에 참전한 아들 존 키플링의 실종으로 심각한 위장 장애 겪었고 이후 십이지장 궤양으로 악화되어 1936년 사망.7

 

 

"백 가지 슬픔의 문(The Gate of the Hundred Sorrows)"

아편을 피우며 죽어가는 이야기가 이렇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잊지 않고 싶었습니다.

 

 

〈덧붙임〉

 

1

 

『현대문학』 2018년 1월호에서 이 소설에 대한 얘기를 보았습니다.8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눈으로 보아야 할 필요가 없는 곳이지."9

(…)

고백하자면, 러디어드 키플링의 단편선을 읽는 도중 처음 이 대사가 떠올랐을 땐 나 역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아편에 취한 채 현실과 흐릿해진 기억 사이를 오가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담긴 「백 가지 슬픔의 문」을 읽을 때만 해도 말입니다. 소설에서 남자는, 지금은 죽고 없는 중국인 노인이 운영하던 아편굴―그때 사람들은 그 집을 '백 가지 슬픔의 문'이라 불렀다지요―의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이제는 완전히 쇠락해버린 그 집 마룻바닥에 누워 애처로우리만치 질이 떨어지는 아편을 얻어 피웁니다. 그런 그가 문득 떠올리는 기억은 사실 '그'의 기억만은 아니며 어쩌면 그 '기억'조차 꿈이나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모두를 '그의 기억'이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인간에게 '진짜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요?10

(…)

지구에는 7,067,893,59811개의 '현실'이 존재합니다. 물론 저 많은, 약 70억 개에 달하는 현실들 대부분은 거의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겠지만, 그러나 아주 작은 것들까지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는 '알라의 눈'12으로 각각을 들여다본다면, 겉으로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아 보이기만 했던 것들이 사실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되겠지요.13

 

 

2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14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평행한 다른 현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잇는 현실은 유일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현실과 평행한 다른 현실들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예를 들어, 이 현실에서 당신이 책을 읽고 있을 때, 제2의 현실에서는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하고 있는 중이고, 제3의 현실에서는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고, 제4의 현실에서는 갑자기 자실 충동을 느끼는 식으로 나무가 가지를 치듯이 평행적인 현실들이 수백, 아니 수천 가지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한 가지 현실이 선택되고 고착되면서 다른 현실들은 증발해 버릴 것이다. 그렇게 한쪽 갈래의 현실이 굳어지면, 거기로부터 다시 다수의 새로운 평행 현실들이 갈라져 나오고, 새로운 가지들이 갈려져 나온 줄기는 차츰차츰 고형화되는 것이리라.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현실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한 것인지 모르지만,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고 고착된 현실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정신나간 생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 물리학이 그와 똑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현실은 단지 앞으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도 전개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예컨대 슈뢰딩거의 고양이15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현실에 걸쳐 있다).

 

 

 

.............................................

  1. 116쪽.

  2. 119~120쪽.

  3. 인도 사람이 유럽 기혼녀에게 쓰는 경칭이며 남자에 대한 경칭은 사히브(118쪽 주).

  4. 120쪽.

  5. 118쪽 주를 보면 '상당히 돈이 많은 시장 여자'라는 본문에 '창녀를 의미한다'는 각주가 있다.

  6. 122~123쪽(이 단편소설의 마지막 부분).

  7. 156쪽 주.

  8. 김희선「경계 너머에, 이야기가 있다-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현대문학, 2018년 1월호 406~416쪽).

  9. 영화「이벤트 호라이즌」에서 차원 너머를 다녀온 우주선 이벤트 호라이즌 호에서 위어 박사가 한 말.(409쪽)

10. 409~410쪽.

11. 세계 인구통계(www.census.gov)에서 찾아본, 지그 이 시각 지구 전체의 인구입니다. 따라서 이 글이 종이책에 실렸을 즈음엔 더 많은 '현실'이 생겨나겠지요.(원문의 주)
12. (…) 『조지프 리디어드 키플링』에 실린 25편의 단편소설 중 맨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알라의 눈'은 일종의 현미경 같은 건데, 작중 등장인물인 존 오토 신부가 멀리 아랍에서부터 건너온 이 대단히 신기한 물건을 수도원으로 가지고 옵니다.(원문의 주)
13. 410쪽.
14. 이세욱,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1, 524쪽.
15. 이 책에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글도 들어 있습니다.(3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