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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스타스가, 5번 스튜디오 Studio 5, The Stars〉

by 답설재 2017. 4. 24.

스타스가, 5번 스튜디오

Studio 5, The Stars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James Graham Ballard

조호근 옮김

(『현대문학』 2017년 2월호, 100~149쪽)1

 

 

 

 

 

 

 

 

 

 

 

  상자 안에 가령 "+3"이라는 '열쇠'를 넣어두면, 위쪽 구멍으로 1을 넣으면 아래 구멍으로 4가 나오고 2를 넣으면 5가 나올 것입니다. 아이들 수학 교과서에서 본 함수기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 함수기 안의 열쇠가 보다 복잡한 것이면 아래 구멍으로 나오는 숫자가 왜 그렇게 되어 나오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지금처럼 시인이 직접 시를 쓰는 시대가 지난, 마지막으로 그렇게 시를 쓴 시인이 사라진 지 50년쯤 지난 어느 날입니다.

  시인들은 VT 세트를 조작해서 시를 씁니다.

 

  " (…) 50년 전에는 시를 쓰는 사람이 몇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잖아. 이제 쓰는 사람까지 사라졌을 뿐이야. VT 세트는 그저 그 모든 과정을 간략하게 만들었을 뿐이고."(130)

 

  그 꼴을 보다 못한 시인 오로라 데이가 시인들이 직접 시를 쓰게 하려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시인들의 VT 세트를 몰래 다 부숴버리고 교묘한 방법으로 월간 시 전문지에 자신이 직접 쓴 시가 인쇄되어 나오게 하고……. 오로라 데이는 시인들이나 출판사 편집인들이 거부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편집 책임자 폴은 곤혹스러운 입장이 되어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오로라 데이의 요청을 들어주려고 합니다.

 

  나는 테라스 전화를 손에 들고 난간에 걸터앉았다.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서 가능한지 확인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첫 번째 번호를 돌렸다.

  레이먼드 마요는 말했다. "내가 직접 쓰라고? 폴, 미친 거 아니야?"

  제로 패리스는 말했다. "직접? 물론이지, 폴. 발가락으로 써도 상관없다면."

  페어차일드 드밀은 말했다. "꽤 멋진 일일 것 같지만, 글쎄요……."

  커터 버터워스는 짜증 섞인 소리로 말했다. "해본 적은 있나? 어떻게 하는 건데?"

  마를렌 매클린틱은 말했다. "어머나, 시도해볼 엄두가 안 나는데요. 이상한 쪽 근육이 굵어지거나 하면 어떻게 해요."

  지기스문트 루티슈는 말했다. "아니, 아니. 지기는 이제 새로운 영역에 들어왔거든. 초우주 충돌 상태의 플라스마를 이용한 전자 조각이야. 들어보라고―"

  로빈 손더스, 맥밀런 프리바디와 에인절 프티는 말했다. "싫어."

  토니가 술을 한 잔 가져다주었고, 나는 계속 목록 아래쪽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용없는 일이야." 내가 마침내 말했다. "이제 시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받아들이자고. 애초에 자네나 나도 마찬가지잖아?"(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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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1930년 중국 상하이 출생. 직물회사 임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 상하이 체류. 진주만 공격 이후 가족과 함께 민간인 포로수용소에 머물다가 2차 대전이 종전되면서 1945년 영국으로 귀환. 1949년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 의학부에 입학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 1951년 작가의 꿈을 안고 학교를 자퇴해 런던대 영문과에 입학하나 다시 자퇴하고 영국 공군에 입대해 캐나다에 배속. 미국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SF 소설을 접함. 제대 후 런던으로 귀환해 결혼. 도서관 사서와 SF 각본가로 일하며 1956년 SF 단편 「도주」 「프리마 밸라도나」가 SF 잡지에 수록되어 작가로 데뷔. 1962년 장편 『근원 모를 바람』과 『물에 잠긴 세계』 출간해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선 후 20세기 후반 영국 소설계의 SF의 뉴웨이브 운동을 주도하며 가장 논쟁적인 작가로 이름을 알림. 포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자전적 소설 『태양의 제국』(1984)으로 <가디언상>을 수상. 이 작품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됨. 수많은 작품을 통해 문명의 이면과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 SF 장르의 시점을 바깥 우주에서 내적 우주로 전환시킨 뉴웨이브의 아버지로 추앙받음. 2006년 전립선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 끝에 2009년 4월 19일 셰퍼튼의 자택에서 사망. 향년 78세.2

 

 

  그렇게 하다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잊었습니다.

  그걸 알면 뭘 하겠습니까?

 

  다만 저렇게 전화를 하는 저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VT 세트라는 것에서 나온 문장들을 한번 봤으면 싶기도 합니다.

  의미가 없을까요?

  혹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뜻도 파악되지 않는 시를 읽으며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우둔한 인간이 됐지?' 생각하는 것과 다를까요?

 

 

 

 

 

 

 

  1. 「고다드 씨의 마지막 세계The Last World of MrGoddard」(150~170쪽)와 함께 실려 있음. [본문으로]
  2. 171쪽 작가 소개에서 옮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