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르나르 Jules Renard 〈필립 집안의 가풍〉
윤옥일 옮김, 동서문화사 2013
1
『홍당무』와 『박물지』(쥘 르나르)를 읽은 것은 그의 『일기 The Journal』 때문이었습니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줄리언 반스)이라는 책에 소개된 그 『일기』는 그냥 넘어갈 수 없을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르나르는 옛날 생각을 하다가 자기 연민에 젖어 어린 시절의 분신을 어루만지는 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사춘기에 생겨나지만, 사람에 따라 평생토록 계속되기도 하는) 그런 연민은 유년기를 재가공해 가짜로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르나르에게 아이란 '작고, 필요한 동물이지만 고양이만큼도 인간적이지 못한' 존재였다. 이는 그가 1887년부터 1910년 죽을 때까지 썼던 걸작, 『일기 The Journal』에 등장하는 단평이다.1
이 부분만이라면 잊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줄리안 반스는 줄곧 상기시키겠다는 듯, 혹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면 시종일관 쥘 르나르의 일기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어쨌든 그 일기를 자주 인용해서 그때마다 찾아보고 싶게 했고, 그렇게 해서 발견한 책이 『홍당무·박물지·르나르의 일기』(합본)였습니다.
2
쑥스럽게도 이 책에 합본된 그의 『일기 Journal de Jules Renard』(1901년 1월~6월)는 그게 "걸작"이라는 걸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 어쭙잖은 독자는 그걸 파악할 만한 전문성이 없는 문외한이기 때문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씁쓸한 일이긴 하지만.
이 합본에는 세 단편(「보헤미안 소년」 「핀」 「필립 집안의 가풍」)도 들어 있었는데 이 작품들이 반짝이면서 「일기」를 '읽을 수 없었던 섭섭함'을 잘 보전해 주었습니다.
「필립 집안의 가풍」에 실린 이야기들(이렇게 나열하는 건 아무래도 어설픈 짓이겠지만, 낡은 초가집, 이불과 요, 마을의 푸나무와 새들, 편지와 전보, 결혼식, 생활의 변화, 지체 높은 사람들과의 관계, 풀베기, 산모의 젖 빨아주기, 달밤에 거름 무더기에서 소변보며 하는 이야기들, 머슴살이, 밭일과 휴식시간, 풍경 등)은 거의 우리의 옛일 같기도 했습니다.
3
그 이야기들 중에서 돼지 잡는 날의 이야기를 옮겼습니다.
그때에는 알려주도록 필립에게 부탁해 두었기 때문에 그는 전보를 보내왔다.
'토요일, 돼지 잡음.'
기차 안에서 12시간, 마침내 필립의 집에 도착했다.
"선생님2은 괜찮으신가?" 나는 물었다.
"네." 필립이 대답한다.
"어디 있지?"
"우리 안에 있어요."
"조용히 하고 있나?"
"이틀 동안 가만히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지 않았어요. 얼마 동안 먹이를 주지 않고 놓아두었다가 잡는 것이 좋으니까요."
"그래야 얌전하지요." 마나님이 말한다. "어제 마당으로 끌려 나와서 걸었는데, 다시 우리 안에 넣을 때 혼자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는데 양처럼 얌전하게 들어갔어요."
"무게는 얼마나 나가죠?"
"200 하고 7근."
"대단한 무게군."
필립이 말했다.
"그렇죠. 맛은 틀림없어요. 아는 농부한테 산 것인데 보리로 키웠다고 하니까요."
"내일 날씨가 좋으면 좋겠는데."
"바람이 북쪽으로 돌았어요." 필립이 말한다. "비가 오지는 않을 겁니다. 오늘 밤 서리가 내리면 아주 좋습니다. 돼지를 잡는데 더할 나위 없는 날씨가 됩니다."
"준비는 모두 돼 있어요?"
"아들 피에르를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운하 쪽으로 일하러 가는 것을 그만두고 돕게 할 작정입니다."
"나도 돕겠어요."
"이웃집 아주머니와 제가 순대를 만들겠습니다." 마나님이 말한다.
"몇 시에 깨우죠?"
"돼지 말인가?"
"네."
"해가 뜨면."
"그럼, 잠을 자고 기운을 차려야지."
"당신이 와주셔서 참 잘 됐어요. 당신 눈앞에서 저것을 잡다니 기뻐요." 필립은 이렇게 말했다.
이튿날 7시에 그는 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굴뚝에서 들어오는 태양빛으로 옷을 입는다. 필립은 막 세탁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칼이 잘 드는지의 여부를 점검한다. 그는 이미 땅 위에 짚을 깔아놓았다. 여자들, 마나님과 이웃집 마나님이 서둘러 바쁜데도 그는 느긋하다.
피에르는 손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와 함께 아버지의 뒤를 따라 오두막으로 간다. 필립은 밧줄 한 가닥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을 입구에서 기다리게 한 뒤 자기 혼자 들어간다. 우리는 귀를 곤두세웠다.
필립이 돼지가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말을 거는 소리가 들린다. 돼지는 이 방문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코를 울리고 있다. 그러나 그다지 만족한 뜻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또 불안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에 익숙한 피에르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아버지는 밧줄로 고리를 만들어 녀석의 다리를 묶으려 하고 계세요."
화를 낸다, 화를 낸다, 돼지가 자꾸 화를 내고 있다. 이번에는 맹렬하게 코를 울리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개가 이에 호응하려 짖는다. 녀석은 도망갔구나, 필립은 돼지를 못 잡은 것이지, 나는 이렇게 판단했다.
"불을 가져와, 불을."
나는 문을 열었다. 그러나 급히 닫았다. 왜냐하면 느닷없이 돼지의 코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나는 피에르에게, 나보다는 솜씨가 좋을 것이므로, 문을 잘 누르고 있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사냥(?)은 이내 끝났다. 필립은 돼지를 오두막 구석에 몰아세우고 짧은 시간 동안 옥신각신한 뒤,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눌렀다.
"문을 열어!" 그는 돼지의 절망적인 울음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오두막에서 나왔다. 돼지는 뒷다리를 한 가닥의 밧줄로 묶였고, 그 밧줄을 필립이 자랑스럽게 움켜잡고 있다. 보니 깨끗한 돼지다. 개운하게 생긴 돼지다. 막 화장을 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해가 비치고 있는 것을 느끼고 돼지 선생께서는 깜짝 놀랐다. 뛰어보지만 이내 멈추고 울음을 그친다. 바깥쪽으로 두서너 걸음 걸어본다. 자유의 몸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이미 여러 가지 물건의 냄새를 맡아보고 있다. 필립은 피에르에게 밧줄을 건네주고 자기는 돼지의 양쪽 귀를 잡고, 다리를 펄쩍거리고 무턱대고 우는 녀석을 펼쳐놓은 짚 위에 뒤집어 놓는다. 여자들은, 한 사람은 천과 피를 채취할 칼을 내밀고, 다른 한 사람은 피를 받을 냄비를 내민다. 피에르는 다리를 잡아당겨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나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뿐이다.
필립은 칼을 입에 물고 자세를 취한다. 한쪽 무릎을 돼지 위에 꿇고 살이 찐 목 언저리를 어루만진다.
웃고 있던 피에르의 표정이 진지해진다. 여자들은 수다를 중지한다. 짚 위에 깔린 돼지는 어느 정도 얌전해졌는데, 있는 힘을 다해 울어댄다. 귀가 먹을 정도로 시끄럽다.
"냄비를 이리 줘요." 필립이 마나님에게 말한다.
"통을 이리 건네줘요." 마나님이 이웃 마나님에게 말한다. "냄비가 가득 차면 그쪽으로 비워야 하니까요."
"어쩐지 쑥스러운데. 쓸모가 없는 사람은 나뿐이야." 이렇게 말하자, 필립이 말했다.
"봐주는 사람도 있어야죠."
그는 손가락으로 표시한 곳에 칼날을 세우고 그것을 찌른다. 찔러 넣는다고 해도 별로 힘을 주는 것도 아니다. 칼은 수월하게 들어간다. 돼지도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울음소리가 높아지고 단말마의 광란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돼지는 이미 움직이지 않고 있다. 희미하게 신음하고 있을 뿐이다.
필립은 칼을 비틀었다. 피가 스며 나온다. 이윽고 넓어진 상처에서 규칙적으로 꿀걱꿀걱 흘러나온다. 피가 튀는 일은 없다. 빨간 끈처럼 진하게 굳어서 흘러나온다. 영웅의 피처럼 풍부하다. 보기에는 잼의 국물처럼 달다.
필립이 상처를 누를 때마다 마나님이 냄비에 받을 피를 통으로 옮기고, 그것을 이웃 마나님이 굳지 않도록 젖고 있다. 이 이웃 마나님은 핏덩어리를 던진다. 그것을 마치 재미있다는 듯이 한다. 빨간 천을 친 것 같은 핏덩이 표면의 무거운 주름을 천천히 느린 솜씨로 붙이기도 하고 떼기도 한다.
사이를 두고 들렸던 돼지 우는 소리가 이제 멎는다. 흐려진 마지막 소리가 마지막 피를 밖으로 밀어낸다. 샘의 흐름이 자갈 위를 날아서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칼날이 아직도 돼지 목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제 피는 나오지 않는다. 돼지는 속이 비었다. 필립은 부드럽게 부빈 짚으로 상처를 틀어막는다.
"필립, 틀림없이 알아요, 돼지가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돼지는 아팠던 것보다도 무서웠던 모양이다. 가죽이 솜털 아래에서 장밋빛을 띠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 고통을 주었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또 여자들이 부엌으로 날라가는 저 피가 모두 몸에서 나왔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다리를 벌리고 일어설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굳어진 모습으로 앞으로 비틀거리듯이 곧장 앞으로 나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일이 가끔 있습니다." 필립이 나에게 말한다. "어떤 때에는 도망도 갑니다.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그러나 필립은 농담할 날은 아니라는 것처럼 돼지의 귀를 쳐들고 그 아래에 있는 작은 흐릿한 눈을 보였다. 인상에 남는 눈이다. 이 정도라면 이제 불에 구워도 되는 것이다.
필립은 그 위에 짚을 씌운다. 그러자 피에르가 불을 붙인다. 갑자기 연기가 치솟아서 눈을 찌른다. 타는 돼지 껍질 냄새, 타는 각질 냄새가 이윽고 우리를 기쁘게 한다. 식욕을 돋운다. 짚 다발로 불을 조절하여 그것을 다리 아래나 귓속에 넣거나 한다.
피에르가 열을 받아 쪼개진 발톱 하나를 줍자 움푹 들어간 곳에 약간의 하얀 부드럽게 보이는 살점이 붙어 있다.
"잘 구워졌어요." 그는 나에게 말한다. "먹어보세요. 마을 아이들이라면 이것을 줍겠다고 난리를 피워요."
"음, 맛은 나쁘지 않군요. 밤 냄새가 나요."
"많이 드세요." 피에르는 이렇게 말하면서 돼지 네 다리의 남아 있는 15개의 발가락에서 살점을 파내어 나에게 던져준다.
그러나 나는 맛있는 것을 나 혼자 먹는 사람이 아니니까 파리의 친구들에게 가져다주고 싶다고 대답했다.3
4
이 단편을 읽으며 재미있는 옛일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써 모으고 〈필립 집안의 가풍〉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 좀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모자이크 같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을 써놓고는
'이건 내 어린 시절 이야기, 그러니까 『홍당무』에 넣고,'
'이건 『박물지』에 포함시킬 이야기,'
'이건 내 『일기』…….'
하고 정리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싶었다는 것입니다.
꼭 그랬던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 이와 같은 작업을 해내기는 비교적 쉬울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나는 분명 그 긴 세월을 맥없이 흘려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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