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교장을 뽑습니다!"

by 답설재 2017. 1. 19.

 

 

 

 

   1

 

"어느 학교 교장을 학부모와 교사들이 투표로 뽑았다네."

그렇게,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투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J 교장(퇴임)은 예상대로 당장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투표로? 그래, 교장을 마침내 투표로 뽑았다고?"

 

더 언급할 가치도 없다는 듯 벌어지는 일들이 점입가경, 오리무중이라고 마무리했습니다. 이젠 직접적으로 어떻게 할 힘이나 기회를 다 잃어버린 사람으로서의 개탄이었습니다.

 

 

  2

 

나는 1969년 3월에 교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교장·교감에게 얼마쯤 신뢰감을 주었겠지요? 몇 년 후엔 경리(經理)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학교 살림살이도 하게 된 것입니다. '행정실' '행정실장' 같은 건 아직 요원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대신 수업시수가 적은 1학년 담임을 맡겨놓고 교장은 아침나절부터 "○○옥(屋)"에서 지역 유지들을 불러 함께 '니나노 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술이 거나해지면 아직 수업 중인 "경리"를 자꾸 불렀습니다. 한 잔만 마시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잠깐만 다녀가시랍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그 말을 몇 번째 전하는 '청부'(급사, 기사, 요즘은 '주무관')가 딱해서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가 얼른 한 잔 받아 마시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며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방해하는 사람만 없어도 좀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3

 

세월이 흘러 나도 교장자격연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우리도 잘 사는 나라가 되어서인지 1주 정도 해외연수까지 시켜주는 것 같던데, 내가 그 연수를 받을 당시의 장관은 좀 유별나서 1주간은 기업체 연수를 받게 하고 나머지 3주간(?)1은 대학교 부설 교원연수원에서 강의를 듣게 했습니다.

 

기업체(LG 인화원) 연수는 활동형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동안 말로만 들은 버즈 학습, 브레인스토밍 같은 걸 실연을 통해 배웠습니다. 평생 연수를 그렇게 많이 받았어도 그런 연수는 처음이었습니다.

잠시도 그냥 앉아서 강의를 듣는 시간은 없었던 그 1주일이 정말 좋았고, 평생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4

 

대학교 부설 교원연수원에 갔더니 드디어(관례대로, 예상한 대로) 전통적인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강의실이나 강당은 열변을 토하는 강사들의 경연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방적 강의를 한다면 나도 한몫하는 사람인데 그걸 듣고 앉아 있으려니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했습니다.

연수생들은 강의를 듣거나 딴생각을 하거나 엎드려 자거나 마음대로였습니다.

 

시험은 5지선다형이었고, 어떤 강사는 슬며시 '핵심'(이를테면 시험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알려준 것 같았고, 반별 대표 중에는 출제 예상 문제를 만들어 복사물을 배부해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논술형 문제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연수생들 반대가 심하고 채점도 어려워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함께 연수를 받은 사람 중에 자격증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연수중에도 이미 "김 교장" "이 교장" "박 교장"…… 하고 불렀으므로 자격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난처할 뻔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5

 

우리가 교장을 할 때쯤에는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학교운영위원회의 "활성화"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교육자치제가 단위 학교에서도 좀 이루어지려는가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지역 교장협의회에 나가봤더니 불만을 터뜨리는 교장이 많았습니다.

"학운위에서 결정하는 대로, 학운위 위원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면, 교장이 할 일은 없는 것 아닌가!"

"이러려면 교장을 뭐 하려고 임명하는가!"…………

 

학교만 가면 아이들을 만나보고 싶고 선생님들,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 좀이 쑤셨는데 그 교장들은 학교운영위원회 때문에 교장이 할 일은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나는 교장 훈화 같은 건 걸핏하면 다른 선생님이나 아이들에게 맡겼는데, 그런 교장들은 단 한 번도 그 훈화를 남에게 시키는 일 없이 자신이 다 하면서도 교장이 할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6

 

나를 꼭꼭 "선배님" "선배님" 하고 불러주는 ―아직도 그렇게 불릴 수 있다니!― 한 "후배님"이 교장자격증을 받았다고 해서 저녁을 사주기로 했는데 그 저녁을 얻어먹었습니다. 기왕 자격증을 받았으니까 공모교장 같은 걸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부추기는데 신경을 쓰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이번에 저 학교 공모교장이 되었습니다.

학교경영제안서를 한번 봐 달라기에 "좋다! 정말 좋다!"고 했을 뿐이었는데, 다섯 명 응모자 중 그가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정말 기뻤습니다.

 

이제 찾는 이도 없고, 퇴임 이후로 온갖 서러움을 받으며 지낸 것 같은 일들을 다 잊어도 좋을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마치 나 자신이 교장이 된 것처럼…….

 

 

  7

 

"변화" "변화" "혁신" "혁신" "innovation" "innovation"…….

말로만 그러지 말고 정말 변하면 좋겠습니다.

공모를 하겠다고 해놓고 알고 보면 이미 대상자를 다 정해놓고 그 짓을 하면 세상은 더욱 나빠질 것 아닙니까?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한다면 증거를 대겠습니다.

 

"교장을 어떻게 선거로 뽑나?"

공모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면, 교사생활을 오래 했다고 교장이 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교직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교육을 더 잘하고 교육행정을 더 잘 한다는 증거를 댈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공모로 뽑힌 교장이 교육을 더 잘하고 교육행정을 더 잘한다는 증거도 필요합니다. 당연합니다.

 

 

  8

 

('젠장!')

이런 생각, 이런 말이나 하니까 동료들은 나를 "좀 이상한 녀석"이라고 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현직에 있는 교원들은 나를 보고 "수구꼴통"이라고 할 것도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쩔 수 없지요. 이렇게 있다가 가는 거지요. ('젠장!')

 

 
  1. 총 4주간인지 5주간인지, 어쨌든 그때까지는 그 교원연수원의 강의만 받았었습니다. [본문으로]

'학교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학교가 다 있다니…  (0) 2017.03.24
게임중독  (0) 2017.02.06
9년 만의 답글  (0) 2017.01.12
"지쳤다"  (0) 2016.11.30
열아홉 가지 동물을 위한 교육  (0) 2016.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