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토플러(1980)는 "노동의 터전이 논밭과 가정에서 공장으로 전환됨에 따라 대중교육(Mass-education)에서 강조된 덕목은 시간엄수, 복종, 기계적 반복 작업"이었다고 비판했다('제3의 물결'). 그는 한국에서 자신의 책은 엄청나게 팔렸지만 일련의 교육적 주장은 묵살되는 것이 야속했던지 방한할 때마다 "한국교육은 붕어빵 교육"이라느니 "밤 11시까지 가르치는 교육으로는 경제적 전망도 밝지 않다"느니 해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더니 지난 6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침내 그런 말을 듣지 않게 됐는가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연초 스위스 세계경제포럼은 올해 초등학교 신입생의 65%는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이어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물리치면서 유명해진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하필 한국에 와서 충격적 발언을 했다.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80~90%는 아이들이 40대가 됐을 때 전혀 쓸모없을 확률이 높다. 어쩌면 수업시간보다 휴식시간에 배운 것들이 더 유용할 것이다."
"그 봐!" 토플러는 병석에서 그렇게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또 그런 전망들이 유력하다면 지금 우리의 이 교육으로 학교와 교사가 예전의 그 빛나는 권위를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아닌가.
교장실에 빨간색 막대로 된 학반별 성적을 게시할 때였다. 그럭저럭 50년 전쯤이다.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세 가지"를 써넣어야 할 ( ) 안에 (의)(식)(주)라고 쓴 아이가 우리 반에는 별로 없었다. 선배 교사들은 "옷, 밥, 집"조차 정답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려고 했다. 의식주의 개념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온갖 자료를 동원해서 재미있게 가르쳤는데도 그렇게 됐고 심지어 '책·선생님·어머니' '믿음·사랑·소망'이라고도 써서 "그것도 옳지 않느냐?"고 호소하고 싶었다.
다른 반에선 아예 글자를 모르는 한둘만 빼고 '의식주' 순서도 바꾸지 않고 기계처럼 답을 썼는데, 그건 사실은 간단한 일이었다. 수업시간 내내 잡담을 한다 해도 단 5분이면 '의식주' 세 글자쯤 외우게 해서 일일이 확인까지 할 수 있고, 딱 한 글자만 쓸 수 있는 ( )가 세 개이니 달리 써넣을 마땅한 답도 없을 것이었다.
이제 그때 그런 일들, 그런 교육은 추억이나 악몽에 지나지 않게 되었을까. 혹 객관식이나 단답형 문항의 편의에 편승하여 면면히 이어져온 건 아닐까. 그런 걸 교육이라고 착각하고 만든 교육정책이 더 견고해진 건 아닐까. 교수의 농담까지 필기하고 녹음한다는 말은 한번 웃자고 하는 농담인가. '고3 교실에서 교과서를 밀어낸 EBS 교재 만능주의'란 어떤 의미인가.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얻는 아름답고 멋진 교육 사례들이다. 숲에서 놀고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는 자연체험교육으로 폐교 위기를 넘긴 초등학교, 학생들이 동아리를 만들게 하고 진로체험학습을 하게 해서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 '대박'을 터트린 시골 고등학교가 대표적이다. '별난 학교'가 아니다. '교육과정'에는 본래부터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게 좋고 옳다는 걸 간파한 학교들이다.
어느 교육청에서는 국어시간에 대본을 쓰고 가정시간에 의상을 만들어 공연까지 하는 예술교육을 하기로 했다. 수영교육을 법으로 의무화하겠다는 국회의원도 있다. '교육과정'에 다 들어 있는 것들이다. '오죽 한심했으면…' 싶어 이해는 하지만, 교육과정을 실천하자고 특별한 시책이나 제도, 법률을 따로 마련해야 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학교 교육과정을 강조하고 연구할 때가 되었다. 교육을 바꿀 이유가 충분해진 것이다. 지금이 개혁의 적기이고 이때를 놓치면 우리 교육은 형편없는 수준에 머물지도 모른다. 세상의 변화를 보면 섬찟한 느낌도 든다. "선생님! 그런 설명은 스마트폰에 다 들어 있어요. 더 쉽고 재미있어요. 한번 보세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개혁은 별것도 아니다. 교육과정에 따라 가르치는 것이다. 선생님들은 벌써부터 그걸 알고 있었고, 그렇게 가르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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