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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종소리」&「상속자」

by 답설재 2016. 7. 31.








                                                                                               2016.5. 양평








                      종 소 리



                                                          박 남 수


 

나는 떠난다. 청동(靑銅)의 표면에서,

일제히 날아가는 진폭(振幅)의 새가 되어

광막한 하나의 울음이 되어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종(忍從)은 끝이 났는가.

청동의 벽에

'역사'를 가두어 놓은

칠흑의 감방에서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

꽃에서는 웃음이 되고

천상에서는 악기가 된다.

 

먹구름이 깔리면

하늘의 꼭지에서 터지는

뇌성(雷聲)이 되어

가루 가루 가루의 음향이 된다.








  설목(雪木) 박두순 시인의 카페 《오늘의 동시문학》에 실린 이 시를 읽고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http://cafe.daum.net/t-dongsimunhag/5K87/526 




  이 시에서는 어떤 비장감이 배어납니다. 1968년엔가 '가을 종소리'라는 제목의 시를 감상에 젖어 읽은 적이 있는데, 나중에 그 시를 찾으려고 두고두고 애를 썼었습니다. 찾아질 리가 없겠지요. 그런 시가 어디 한두 편도 아닐 것이고, 어느 책, 어느 신문에서 본 건지도 모른다면 불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래, 시덥잖은 시도 보는 그 순간 마음에 들어오면 강한 여운을 남기는데 내가 '가을 종소리'에 취했던 것이었구나 하고 그 시를 찾지 못해서 아쉬워 하는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며 지냈습니다. 그 시가 이 시였다면 시를 보는 눈이 제법이라는 말을 듣겠지만 그것도 아니니 뭐 그만두는 게 좋겠지요. ㅎㅎㅎ



  웃기는 수준의 댓글이어서 그럴까, 더구나 문인들이 보는 카페에 공개된 글인데도 옮겨놓고 보니까 쑥스럽다.

  댓글이라는 게 참 편해서 웬만큼만 예절을 지켜주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이쪽의 감상(感想, 鑑賞)을 가볍게 전할 수 있는 편리한 점이 있는데, 그렇지 못하여 서로 언짢아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설목은 "댓글이 맛깔스럽다"는 촌평으로 답해주었다.






  나는 이 짧은 답글이 흡족하였다.

  댓글이란 걸 길게 쓰면 피차 부담스럽고, 답글도 그렇다. 어느 블로그에 가서 달고 온 짤막한 댓글에 장문의 글이 답글로 실린 걸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특별한 것도 아닌 상식적인 것을 그렇게 무슨 평범한 수준의 계몽을 위한 강의록처럼 쓴 것은 자신의 블로그에서니까 누가 뭐라고 할 바는 아니지만 댓글을 단 나로서는 읽기에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릴없이 논쟁이나 의견교환을 할 여력도 없으려니와 그런 걸 할 만한 소재도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이런 경우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나이에, 예전에 교육부에서 초·중·고 교육과정을 만들고 교과서를 개발하고 심사하고 수정할 때 수없이 읽고 떠들어대던 그 정도의 수준도 아닌 내용의 '강의'나 듣고 다녀야 한다면 그건 한심한 일 아닌가!


  '긴 글을 써주면 좋아할 것으로 짐작하는 건가?'

  결코 그렇진 않고, 블로그 말고도 '한심한 짓'으로 소비하는 시간이 길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낯모르는 사람들과 그렇게 노닥거릴 시간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심한 짓을 하는 시간에다가 그렇게 노닥거리는 시간을 더하게 되면 과연 그 시간이 얼마나 길어지겠는가. 결국 나는 어떤 인간이겠는가.


  아마도 사람들이 답글을 쓸 때 대체로 댓글의 양만큼 써주는 건 이러저러한 사정들을 고려해서 그럴 것이 분명하다.

  '이만큼 써주면 괜찮겠지?'


  설목의 그 답글에 대해 나는 또 다음과 같은 답글을 달았다.



  얼마 전에 어느 신문엔가 월간지엔가 종소리를 소재로 한 시가 발표된 걸 봤는데(아, 참…… 스크랩해 둘 걸 그랬네요. 이런 참……) 고속버스터미널을 지나며 땅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걸 들었다던가 어쨌다던가 그랬는데…… 좌우간 다음에 그곳을 지나게 되면 한번 귀를 기울여보려고는 합니다만…… 혹 시인에겐 들리고 저에겐 들리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유념해보긴 해야지요. 시인이 되지 못한 게 한스러울 뿐입니다. ㅜㅜ



  "댓글이 맛깔스럽습니다."


  설목의 이 답글에 대해 나는 또 장문(長文)의, 더구나 허접하고 객쩍은 소리를 했으니 그가 기겁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부터는 짧은 댓글, 답글을 써도록 할 것이다. 멋진 시의 한 구절처럼! 아니, 그런 형식을 흉내내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아니 이 멋진 세상에서 '헛된 힘'을 쓸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오래전 까마득한 날에 읽었던 「가을 종소리」는 영영 찾지 못하고 말겠지만, 고속버스터미널 땅속의 '종소리'(「상속자」)는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시 한 편.







                                           상 속 자



                                                                                     김 경 후



  그는 종소리의 상속자,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종소리, 그 종소리의 상속자다,


  자정의 고속버스터미널, 46억 년쯤 된, 진흙종, 아무도 모르게, 엎어져 있다, 그 옆엔, 종소리의, 상속자가, 쪼그려 있다, 짓밟힌 진흙같이, 오고 가는 흙자국들, 떠나고 돌아오는 흙먼지들,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으깨져, 아무것도, 떠나지 못한다, 돌아오지 못한다,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종소리는, 검은 터미널 같구나, 아무도 듣지 못하는 종소리, 자신도 들은 적 없는 종소리를, 노래 부르는 것밖에, 그 밖에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종소리의 상속자다,


  어쩌면 46억 겁 전의 심해 속에, 떨어져 있었을지 모르는, 아무 소리 없는, 종이 있다, 그는, 아무도 가진 적 없는, 숨과 혼으로, 으깨진 흙의 음을 맞춰본다, 종소리를 들어본다, 아무것도 아닌, 그는, 종소리의 상속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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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후  1971년 서울 출생. 199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열두 겹의 자정』. <현대문학상> 수상.


                                                            『現代文學』 2016년 5월호, 196,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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