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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한 준비

by 답설재 2016. 6. 19.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한 준비






                                                                                                전혀 엉뚱한 누렁이






  극락이나 천당, 지옥 같은 게 있다는 말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쩌면 모두들 악착 같이 살면 다 피곤해지니까 마음이 약한 혹은 순한 사람이라도 좀 느슨하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지어낸, 확인할 길 없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더러 저승 생각을 하며 지냅니다. 죽은 후에도 영혼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고,1 실제로도 있을 것 같고, 반갑든 아니든 가서 만나야 할 영혼이 있을 것 같고, 어떤 영혼은 내가 도착하면 한번 따져보고 싶은 게 있다며 수십 년을 벼르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왜 그렇게 박대(薄待)했니?"

  아, 이런!

  만나자마자 그렇게 나올 것 같은 영혼은 하필 그 누렁이의 영혼입니다.





  늦게 취학하여 읍내 중학교에 들어갔을 땐 '이미' 1960년이었지만, 그조차 별 목적이 없어서 그저 주말에 집에 가는 게 낙(樂)이고 현실적인 목표였습니다. 부모님은 그 기다림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누렁이가 그 분위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개를 오래 키우면 영물(靈物)이 된다"느니 하는 말은 개를 일단 인간 이하로 낮추어 놓으려는 의식, 또 적당히 키워서 내다 팔아 돈을 마련하려는 핑계였을 것입니다.

  그건 그때는 "개 같은 놈" "개만도 못한 놈"이란 말을 자주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개는 차라리 인간 같진 않구나' 싶고, 이렇게 어지러운 사회라면 차라리 개와 함께 단순·소박하게, 정직하게, 정답게, 바르게 사는 삶이 백 번 낫겠다!' 싶고, 걸핏하면 "개나 소나" 어쩌고 하는 말이 잘못된 것 아닌가 싶기조차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것입니다.


  드디어 주말, 가족들이 나의 귀가 얘기를 하면, 마당에서 엿들은 멍멍이는, 어둔 밤길을 걸어 혼자서 2킬로미터는 됨직한 그 산기슭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별만 총총한 밤에 그 오솔길에서 내가 놀라 나자빠질까봐 그랬는지 짓지도 않았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에 잠겨 산길을 넘어가면 돌연 '후다닥' 덤벼들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그 녀석을 걷어차버렸습니다. 캄캄한 산기슭에서 놀라기도 했겠지만, 교복 위에 흙 묻은 두 발을 들어올려 마구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멍멍이는 잽싸게 집으로 달려가서 내가 저만큼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런 날들이 가슴아프게 합니다. 밤중이나 첫새벽에 잠이 깨면 불현듯 그 개가 생각납니다. 그게 지금 어디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도련님'으로 여겼는데 어떻게 그처럼 남루하게 지내느냐고 측은해 하고 있을까…… 내게 모질게 대하더니 꼴 좋다고 비웃는 건 아닐까……


  개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미즈바야시 아키라가 그의 개(골든레트리버)를 위해 쓴 '사랑의 연대기' 《멜로디》,

  그 소설에서 아름다운 책이라고 소개한 로제 그르니에의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Les Larmes D'Ulysse》,

  그 두 책은 읽어야 할 다른 책들도 소개하였습니다.


  이 책들을 읽으며 확신하게 된 것은, 개들은 나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아니 이까짓 영혼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는 것, 그때 그 누렁이의 영혼은 분명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럽고 눈물겹고, 그러나 위안이 되는 확신입니다.





  다시 한 번 더 팔라틴 공작부인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그 여자는 개들의 영혼이 영원불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의 부모와 친구들뿐만 아니라 자기가 사랑했던 모든 귀여운 동물들을 저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늘 기뻐한다.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원제 : '율리시즈의 눈물')》에서 로제 그르니에는 이렇게 썼습니다.2 그는 이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개 같은 것에게 무슨 영혼이 있겠느냐고 한 데카르트나 그 추종자 말 블랑슈를 다음과 같이 비웃기도 했습니다.


  17세기는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가 앞에서 말했던 데카르트 독트린의 지극히 특별한 한 가지 면에 대해서 의견이 다른 두 가지 진영으로 갈라진다. 말 블랑슈는 동물은 기계라고 해서 자기 집 암캐를 발길로 걷어찬다. 그러나 세비녜 부인3은 데카르트와 그의 이론의 본질을 이렇게 꼬집는다.

  "사랑을 하는 기계. 어떤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는 기계. 질투하는 기계. 겁을 내는 기계."

  그러면서도 너그러운 부인은 이렇게 덧붙인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정말 그렇게 믿도록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4





  이타카 왕 율리시즈는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 페넬로프는 자신의 자리를 잘 지켰을까요? 사람들은 변했지만 죽음 직전의 늙은 개 아르고스는 거지꼴로 돌아온 율리시즈를 단박에 알아보았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책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의 머리말은 율리시즈와 그의 개 아르고스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주인이 집을 떠나고 없는지라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개는 대문 앞, 노새와 소들이 배설한 거름더미 위에 퍼질러 누워 있었다. 율리시즈의 하인들은 드넓은 영지의 땅에 시비할 거름을 푸러 찾아오곤 했다. 아르고스는 거기서 이가 뜰끓는 몸을 눕히고 잠을 잔다. 개는 찾아온 사내가 율리시즈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리고 꼬리를 흔들었지만 두 귀가 축 늘어진 채 일어서지 못했다. 기진맥진하여 주인에게 다가갈 힘이 없는 것이었다.

  율리시즈가 개를 보았다. 그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르고스는 그 순간 숨을 거두었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나의 누렁이도 우리의 두 영혼이 다시 만났을 때 나를 곤혹스럽게 할 리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사람을 그의 의지로 곤혹스럽게 하는 건 천성(天性)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또 가슴이 아픕니다.










  1. 종교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이!(우선 덜 심심하고 재미도 좋으니까) [본문으로]
  2. 로제 그르니에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Les Larmes D'Ulysse』(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02, 88쪽), 「동물―기계」 중에서 [본문으로]
  3. 세비녜 부인은 남불 그리냥성으로 시집간 딸 프랑수아즈 마르그리트와 30여 년 동안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당대 풍속묘사가 일품인 그녀의 《서간집》은 프랑스 문학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이룬다. 전화만 걸거나 이메일만 보내는 요즘 사람들에겐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기품 있는 옛 문학의 한 장르이다. 이 《서간집》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아주 귀중한 대접을 받고 있다.(옮긴이 김화영의 주) [본문으로]
  4. 이 책 87쪽 「동물―기계」시작 부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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