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이야기
한강. 2016.3.12.
Ⅰ
아이들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들? 저 강물처럼 흘러가버린 세월 때문에 어느덧 오십 넘은 '아줌마'들입니다.
Ⅱ
전에도 얘기한, 지금 남해안 어느 곳에서 배(아니면 기차, 아니면 비행기, 비행기도 아니면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아줌마'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일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 바다 위로 펼쳐진 저녁놀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찬란한 노을 속에서 살아가고 있구나 싶더라고 했습니다.
봉급은 아주 적고 엄청 고달픈 동남아 사람들 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일꾼들은 그들에게 예사롭게 욕지거리를 늘어놓는답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욕을 해대는 그들에게 더 심한 욕을 마구 쏟아부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모 때문에 어떻고" 하며 돌아선다고 했습니다.
나는 딱 한마디 "그 잘하네" 해주고 생각했습니다.
'얘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시(詩)와 같구나.'
'얘는 다문화 가정, 세계화 교육, 그런 용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일까? 웃기지도 않는다고 할까? 인간의 존엄성, 인류애, 인성교육, 그런 용어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부끄럽지 않은가! 잘난 사람들…… 돈 많고, 지위 높고, 지식 풍부한 많은 사람들…… 내가 가르친 6학년 교실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앉아 있던, 그 후로는 교실에 들어가 본 적 없는 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욕설로써 쓰는 시(詩)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Ⅲ
창원 사는 '아이', 서울 사는 '아이'도 그런 노동자들 얘기를 했습니다. 일 시키기가 어렵지만, 문화가 다른 걸 알아야 하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가 그런 취급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겠구나 했습니다.
'그렇겠구나' 하고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뭐라고 좀 떠들어댔습니다.
나는 걸핏하면 후회할 짓을 합니다. 괜히 끼어들지 말고 저 강물 구경이나 하며 듣기만 해도 좋았을 것입니다. 걔네들이 다시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것도 아니잖습니까. "선생"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가 봅니다.
Ⅳ
정작 해야 할 말은 못 하였습니다. 그것도 미안한 일입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조용한 밤 잠자리에 누우며 몇 번 연습까지 해 두었는데…… 별것 아니라고 하겠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것,
더는 나이 들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 그럴 수 없으면 늙지나 말라는 것,
그것도 안 된다면 그럼 부디 행복하라는 것……
죽을 만큼 아파봐서 아는데 아프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
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얘들도 38년 만엔가 만났지만, 흔히 "선생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하고 묻는데, 그러지 말고 "제가 그때 어떤 모습이었어요?" 하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가르친―"가르친"? 좀 이상하긴 합니다―아무튼 1년간 함께한 아이들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 치매가 오면 그땐 도저히 안 되겠군요. 그러면 나는 그들을 빤히 들여다보고 "이분이 누구시더라?" 하겠지요?
"저 기억하시겠어요?"에 대한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내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내 사랑은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짝사랑입니다.
아이들은 대체로 나를 잊고 살아가지만, 나는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잊을 수가 없어서 생각하고, 생각나면 당연히 나보다는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Ⅵ
'실체가 없는 사랑'이니까 찾아오지 않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공감하는 일입니다. 누가 그렇게 쉽게 찾아오고 찾아가겠습니까.
그래서 다음에 또 보자고 하면 '그래, 그러면 참 좋겠지만……' 하게 되고, 이번처럼 진짜로 나타나면 '얘들 봐, 진짜 왔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 "아이들" "얘" "걔" 하니까 우스운 일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그렇게 각인(刻印)되어 있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각인으로 잘 지내기를 바라는 '내 아이들' '내 사랑'입니다. 어려운 이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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