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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세돌 Ⅰ : 마음연구?

by 답설재 2016. 3. 13.

조선일보 2016.3.10. 1면.

 

한겨레 2016.3.10. 1면.

 

 

 

오후에는 바둑을 배웠다. 그것은 수많은 흑색과 백색 돌로 된 고상한 판놀이였다. 희고 고운, 종이 같이 엷은 바둑돌에서 나는 바닷가의 조개 부스러기를 연상했다. 검은 돌은 굵고 둥글며 석판처럼 회색이 돌았다. 그것들은 강바닥에서 주워 온 것 같았다. 내가 주의 깊게 희고 검은 돌들을 살피고 있을 때,

"자, 검은 돌을 쥐어라."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네 힘껏 돌을 판 위에 놓아라!"

나는 그렇게 했고, 위가 바둑판인 상자는 맑고 은은한 소리를 오랫동안 울렸다. 상자의 빈 곳은 많은 동선으로 감겨 있다고 아버지는 설명했다.

"상대방이 돌을 놓거든 소리가 울리는 동안 기다려라. 그리고는 너의 돌을 놓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경솔하게 놓지는 말아라."

나는 20점을 받아 쥐어 대국은 시작되었다.

"천천히!"

내가 돌을 잡고 유리하게 보이는 점에 가려고 급히 서둘면 아버지는 항상 말하였다.

"언제나 처음에 잘 생각해야 한다. 적의 약점은 종종 착각일 수가 많다."

한번은 아버지가 바둑 놀이는 원래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선에게 속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신선들은 지상의 산정에 내려와서는 이 놀음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넌 아이들이 경주를 할 때처럼 그렇게 성급하게 노는 신선을 상상할 수 있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신선은 아주 고상하지요."

"너는 신선 세계에 잘못 들어가 그들의 놀이를 구경하였던 나무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지? 그가 옛날 살던 곳에 돌아왔을 때 도끼자루가 썩은 것을 발견했다는 거야. 이 시간 없는 신선의 놀음은 지상의 인간에게는 너무나 오래 계속된 것이지."

우리는 바둑을 두고 또 두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신 오후에 나는 언제나 바둑판을 그늘진 나무 아래 갖다 놓아야 했다. 아버지와 나는 판을 앞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계속해서 졌고, 그런데도 한 번은 이기리라는 것을 꼭 믿고 있었다. 우리는 서늘한 그늘에서 구월이 저녁밥이 준비되었다고 부를 때까지 연달아 수없이 두었다.

 

 

 

 

 

이미륵이 쓴 『압록강은 흐른다』의 한 장면입니다.1 이미륵(1899~1950)은 인도적인 선각자로 일찌기 독일로 건너가 살면서 동양인의 긍지와 정서를 서구에 인식시켰으며 독일 뮌헨대학에서 중국학을 강의하기도 했습니다.2

 

'바둑은 신선놀음'이라는 이야기가 정겹고 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무쳐서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KAIST 김대식 교수(전기 및 전자과)는 "이세돌 9단이 보여준 건 우리의 미래"라고 했고, '알파고AlphaGo'를 만든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공동창업자 겸 대표는 KAIST 초청 강연에서, "사람과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이 나오려면 수십 년은 걸릴 것"이고 "인공지능은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 인간에게 해를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만일에 있을지 모르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답니다.3

 

수십 년 걸린다면 나는 그때까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고, 인간에게 해를 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나는 싫습니다.

만일에 있을지 모르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토론을 해야 한다? 그것도 싫습니다. 두렵기도 하고, "그래, 토론해보자" 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사람들이 나타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과학자들이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겠다고 드러내놓고 연구한 것이 한 가지라도 있었습니까? 언제나 그걸 이용해서 돈을 왕창 모으려는 것들 때문에 탈이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히브리대 역사학과 교수로,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쓴 유발 노아 하라리(Harari) 교수는 2100년 이전에 나타날 신인류는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은 신(神)적 존재"가 되며, "21세기 후반의 신인류는 생명을 창조하고, 정신을 통해 가상·증강현실에 접속하며, 신체를 계속 재생해 사실상 불멸에 이른다" "2100년에 가장 활발히 거래되는 상품은 다른 무엇도 아닌 건강한 뇌, 피, 신체기관이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답니다. 그는 또 "태고부터 인류의 긴 역사를 보면 현세대는 이미 사회성과 지각 능력 등 '인간성'의 주요 특징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며 따뜻한 감성을 지닌 존재가 되려면 "지금부터 '마음'에 대한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4

 

'알파고'라는 '괴물'이 "이젠 내가 신선"을 하겠다며 1200여 대의 무슨 기계5를 연결한 거창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마음에 대한 연구를 새로 할 필요가 있을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에 대한 연구?

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연구로 존경해 마지 않는 '돈'이 되겠습니까? 바빠서 야단인데 할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우선 눈앞에 다가온 중요한 일들 때문에 되겠습니까? 돈벌기, 대학가기, 일하기……

그렇다고 우리가 먼저 법을 정하기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연구특별조치법'?

 

 

 

 

'사람의 대표' 이세돌 9단의 표정이 많이 쓸쓸해 보입니다. 두 사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저 표정이 '우리의 것'일 수도 있겠지요.

이세돌 9단 뒤에 서 있는 저 사람은 '알파고'를 개발했다는 구글 지주회사 '알파벳'의 에릭 슈밋 회장이라는데 저 표정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왜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난처할 것 같습니다. 저 분에게는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AlphaGo resigns."

 

이 글을 쓰면서 제4국에서는 알파고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에 이 귀퉁이에 앉아 있는 다른 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지금 매우 흥분했습니다. 워낙 격이 낮아서 그럴 일이 있을 수 없지만 이 순간 이세돌 선수가 옆에 있으면 좋겠습니다. 좀 쉬는 동안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지, 뭘 좀 주면 좋겠는지, 저 소파에 기대고 앉아서 커피나 와인이나 물이나 위스키나…… 말만 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런! 이제 생각났습니다. 배달을 시킬 수 있는 것도 좋겠습니다. 쏜살같이 갖고 올 수 있는 것들도 많으니까요. ^^ 가령 치킨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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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전혜린 옮김, 범우사, 1997, 3판3쇄), 99~101쪽.
2. 위의 책, '지은이 소개' 참조.
3. 조선일보, 2016.3.12,A6. '사람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 수십년 더 걸려'
4. 위의 신문, 2016.3.12, A8. '2100년 이전 현생 인류 사라질 것... 알파고가 그 신호탄'
5. 알파고는 1202개의 CPU 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 처리 장치), 176개의 GPU(그래픽 처리 장치), 1000대의 서버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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