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손택수 「차경」

by 답설재 2015. 9. 22.

차경

 

 

손택수

 

 

한옥에서는 풍경도 빌려 쓰는 거라네요 차경借景, 창을 내고 문을 내서 풍경을 들이는 일이 빚이라고,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고

 

직업이 마땅찮아 어떨지 모르겠으나 가능하다면 저도 풍경 대출을 받고 싶어요 집 살 때 빚지는 것도 누가 재산이라고 그랬지요 빚 갚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어느새 제 집을 갖게 된다고

 

풍경 좋은 곳은 다 부자들 차지라지만 아무리 좋은 액자인들 뭐하겠어요 청맹과니처럼 닫혀만 있다면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지기 힘든 게 풍경 빚인 줄도 모르겠어요 가난하고 외로워할 줄 아는 사람에겐 창가에 스치는 새 한 마리도 다 귀한 풍경이니까요

 

갚는다는 건 되돌려준다는 거겠지요 빌린 나도 풍경으로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도무지 뭘 빌려주었다는 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앉아 있는 저 돌처럼, 저도 빌려 갈 만한 풍경이 되어서

 

 

 

――――――――――――――――――――――――――――――――――――――――

손택수  1970년 전남 담양 출생. 1998년 『한국일보』 등단. 시집 『호랑이 발자국』『목련전차』『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편지들이 빛난다』. <신동엽창작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이수문학상> 수상.

 

 

 

 

 

 

 

 

집을 나올 때나 들어갈 때 우리 마을 이곳저곳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이 저 자연을 다 망치는가 싶어서 감시하는 사람처럼 바라보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냥 바라보기만 합니다. 저 건너편 산쪽을 바라볼 때는 이리저리 얽히고 설킨 전깃줄 같은 건 없다고 치고 산자락만 바라봅니다. 때로는 아파트도 없다고 치고 바라보고, 산의 모습만 오려서 액자에 담듯 바라보기도 합니다.

'저기 산이 그대로 있구나.' 마음을 놓습니다.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미의 새 옷」  (0) 2015.11.05
이우환 「보이는 것」  (0) 2015.10.22
서대경 「까마귀의 밤」  (0) 2015.09.16
이생진 「칼로의 슬픔」  (0) 2015.09.03
강기원 「일요일의 일기」  (0) 2015.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