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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서대경 「까마귀의 밤」

by 답설재 2015. 9. 16.

까마귀의 밤

 

 

서대경

 

 

헌책방 구석 책 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는 작은 책상 위에 웅크려 있던 백발의 노인이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문 닫을 시간이야. 노인의 왼쪽 눈이 소리친다. 벌써 어두워졌군. 노인이 입가의 침을 닦으며 중얼거린다. 문 닫을 시간이라고. 알아. 노인이 대답한다. 노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책장들 사이로 난 비좁은 통로를 걸어간다. 영업시간이 끝났으니 내일 다시 오시오! 노인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친다.

 

노인은 산발한 머리를 갸우뚱하며 오른쪽 눈이 깨어나길 기다린다. 일어나. 게으름뱅이야! 노인은 춤을 추듯 몸을 앞뒤로 건들거리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간다. 노인은 책상 위에 놓인 원고 뭉치를 내려다본다. 노인은 원고를 집어 든다. 밤길 걷는 사람. 노인이 제목을 중얼거린다. 누가 쓴 거지? 네가 썼잖아. 왼쪽 눈이 말한다.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가 잤다고? 그럼 누가 가게에 불을 켰지? 노인은 원고를 들고서 창가로 다가간다. 말해봐. 내가 지금도 자고 있어? 노인이 왼쪽 눈에게 묻는다. 오른쪽 눈이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바라본다. 어두운 가로등 불빛 속으로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다.

 

지금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알 수가 없군. 가게 안엔 언제나 아무도 없고, 창밖에선 언제나 눈이 내리고 있으니 말이야. 지금이 오늘이야? 지금은 언제나 오늘이지. 이 노망난 늙은이야. 왼쪽 눈이 말한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노인이 오른쪽 눈에게 묻는다. 오른쪽 눈은 말이 없다. 노인은 오른쪽 눈을 몇 번 꿈쩍거려본다. 노인은 실내의 조명을 끈다. 간판불을 켜두었던가? 문 앞에 서서 노인은 문을 열고 나가볼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왼쪽 눈이 서서히 내려오는 노인의 눈꺼풀 뒤에서 까마귀처럼 선회한다. 오른쪽 눈이 꿈의 안개 속에서 검게 웅크린다. 먼지 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노인의 구부정한 어깨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눈발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흠칫 몸을 떨며 노인이 깨어난다. 집에 가야지. 노인은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가 서류가방에 원고를 쑤셔 넣고 검은 모자를 머리에 쓴다. 노인이 의자에 몸을 기댄다. 노인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귀 기울인다. 내 집이 어디지? 노인이 왼쪽 눈에게 묻는다. 왼쪽 눈이 메마른 웃음을 터뜨린다. 노인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오른쪽 눈이 눈꺼풀 틈으로 창밖의 불빛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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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시와세계』 등단.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현대문학』 2015년 9월호

 
 

 

2011년 6월 새한서점

 

 

 

2011년 6월, 소문을 듣고 충북 제천 어느 산골짜기에 있는 새한서점을 찾아갔습니다. 산비탈에 수십만(?) 권의 헌책을 쌓아놓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주변에는 인가 한 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는 헌책을 팔아서 건물 임대료도 물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그런 곳으로 이사를 한 것 같았습니다.

 

몇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예전에 을유문화사에서 낸 『인현왕후전』도 발견했습니다. 『인현왕후전』은 눈에 띄는 대로 다 사서 읽었지만 아무래도 그보다는 절절한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걸 집에 찾아온 누구에겐가 얘기한 것 같고, 언젠가 그 책을 다시 읽어보려고 했더니 감쪽같이 없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인에게 값을 물었더니 '너무 높은 가격을 부르면 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달라는 가격을 다 주었는데도 왠지 미안해서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다시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2011년 6월이면 심장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고, 지금은 그때보다는 형편이 나아졌는데도 다시 가지 않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나는 새한서점 주인에게 사기를 친 것이 아닌가, 게름직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까마귀의 밤」은 새한서점과 전혀 상관도 없는 시인데도 자꾸 그 서점이 생각났습니다.

저 시 속의 저 노인이 혹 내가 변장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어서 읽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시는 참 좋은 것이고, 헌책방도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어서 이 세상도 좋은 곳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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