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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어느 지식산업 종사자의 고백 (2015.6.8)

by 답설재 2015. 6. 17.

 

 

 

 

 

 

어느 지식산업 종사자의 고백

 

 

  지식산업 종사자! 아무래도 거창한 이름이다. 지식산업, 지식기반산업! 자랑스러울 때도 있지만 학교 교사들도 자신들이 하는 일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 걸 보면 쑥스럽고 민망하다. 어떤 일을 하기에 그러느냐고 캐묻지 말고 이 고백이나 들어주면 좋겠다.

 

  지식산업 종사자라고 해서 교사들과 같은 수준의 신념, 책무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고, 실제로 그런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그저 관련 법규를 준수하면서 수요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주고 대가(代價)를 받아 큰 변동 없이 지낼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큰 변동이 없었으면…' 하는 점에서는 듣기에 편한 말이 있는가 하면 불안감을 주는 말도 있다. "선의의 경쟁으로 학력을 높여야 한다!"면 우리 입장에선 부담이 없는 말이다. 악의의 경쟁도 있긴 하겠지만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의문이고, 경쟁을 즐기는 학생이 얼마나 되는지도 묻고 싶다. 경쟁은 치열하고 혹독하지만 '선의'라는데 할 말이 있겠는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게 하자!" "수월성을 높이자!"는 주장도 결국 "경쟁을 시키자"는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 명이 수십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말도 우리가 듣기에는 편하지만 무책임한 점이 있다. 살아가기가 이렇게 어려운 세상에서 그 한 명을 바라보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런 입지전적 인물이나, 그 인물을 닮을 수도 없고 닮을 필요도 없는 어쭙잖은 수십 만 명이나, 살아가야 할 미래는 공평하게 닥쳐오고, 게다가 누구에게나 험난하다면, 어느 학생에게나 동등한 비중의 교육을 제공해주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경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게 최우선의 교육 원리로 작용하는 현실은 가소롭고 서글프다. 경쟁을 조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서비스 제공자에겐 신경 쓸 일이 그리 없다.

 

  예상외의 인물,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등장한 인물을 두고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 용을 미리 정해서 가르쳤다면 그건 개천에서 용 난 것이 아니고 특급 대우다. 교재를 설명해주고 암기시키면서 용이 나오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 용의가 있다.

 

  이처럼 불합리한 점이 있어도 듣기에 안심이 되는 말에 비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례도 많다. 가령 "미국의 엘리트 교육에는 수학 공식이 없다" "토론 중심 수학수업을 하지 않고 문제풀이나 고집하면 필즈상 수상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으면 당황스럽다. 그럼 기계처럼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일이 전문인 우리는 장차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것이다.

 

  지난달에는 국제과학기술경진대회에 다녀온 어느 학생이 "한국에선 이론만 달달 암기하면 최고인데, 미국에선 그 이론을 자유자재로 응용해야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했다. 한마디로 끔찍하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지난해에도 교육개혁 심포지엄에서 "우리는 오래 공부하는 것이 문제다!" "만점자가 아니라 창의력을 키워야 한다!"고 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지난달 교육 분야 세계 최대 국제회의 '세계교육포럼'에 와서 또 그런 말을 했다. 방한할 때마다 그러던 앨빈 토플러처럼…. "모든 학생의 목표가 같은 게 문제다" "밤 11시까지 공부하는 건 학생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한국의 학교는 학부모들 의식 변화를 못 따라간다. 혁신이 시급하다."

 

  자꾸 이러다가 "우리도 이제 교육을 바꾸자!"고 할까봐 조마조마하다. 학교에서는 "어렵다" "못하겠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럴 수도 없다. 뭐든 다 해야 살아남는다. 수준별 학습, 소집단 학습, 개별맞춤학습….

 

  국제대회를 자주 개최하지만, 일단 지나고 나면 흐지부지하고 그만인 점은 다행스럽다. 지난해 세계수학자대회 때도 온갖 주장이 나왔지만 이내 조용해졌다. 세계교육포럼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붕어빵 교육"이니 뭐니 하던 앨빈 토플러도 이젠 오지 않는다. 부디 큰 변화 없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