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님!
오늘 신문에 실린 제 원고의 제목을 보고 이 메일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100회 이상의 원고를 쓰면서 어느덧 이 신문에 대해 애착심, 자부심 같은 걸 느끼게 되었고,
제 이름보다는 신문의 이름에 누를 끼쳐서는 안될 것이라는 책무성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제가 아무래도 둔재이기는 하지만 그 둔함을 초고를 써서 40~50회 정도로 고치고 다듬어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신문에 실린 제목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하루종일 생각하다가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고에 붙인 제목 "등교시각 정하는 법, 혹은 방법"은 "등교시간 상식 수준에서 논의해야"로 바뀌었습니다.
시각과 시간은 그 뜻이 다르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혼용하기도 하지만, 학교에서나 교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신문에서는 독자들이 이해하는 수준에서라면, 보다 정확한 표현을 지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으로, 등교시간을 "상식수준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표현은, 교육계에서 받아들이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교육청이나 다른 교육기관에서 "지금의 논의가 상식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신문사(데스크)에서는 제가 생각하는 이런 면보다는 더 폭넓고 깊이 있는 논의를 거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당연한 일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원고를 수십 번 고쳐쓰는 필자의 노력도 감안해 주셔서 한번쯤 연락을 주시면 추가적인 의견이라도 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등교시각 정하는 법, 혹은 방법"이라는 제목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등교시각을 법률을 정하듯 한다는 의미와 함께
교육선진국인 핀란드에서는 교사가 교육방법적인 측면에서 정한다는 의미를 갖게 하는 제목으로 설정한 것이며,
일반독자들에게는 친숙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제 이 신문의 '오피니언'에서는 이런 제목도 더러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점,
칼럼을 읽는 독자 중에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주는 이가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한 제목이었습니다.
주제넘은 말씀이지만, 저는 1930년대에 런던통신 칼럼을 썼고, 그 글들이 오늘날에도 수없이 읽히고 있는 버트런드 러셀을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메일을 드리고 나서도 혼자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은, 앞으로는 제가 "어떻게" 제목을 붙여야 좋을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모르고 있는 점을 알려주시거나 다시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말씀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