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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등교시각 정하는 법, 혹은 방법

by 답설재 2015. 1. 9.

 

 

 

 

 

 

  경기신문 시론 110

 

 

등교시각 정하는 법, 혹은 방법

 

 

 

  핀란드 헬싱키대학의 한국인 교수가 현지 초등학교 교사 비르바 라이사넨을 데리고 찾아왔다. 한국어를 배운다는 그 교사와 몇 가지 얘기를 나눴다.

 

  새해에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고 왔다기에 그 성격을 궁금해 했더니 새 학년도 교육을 위해 꼭 들어주어야 할 것들이고, 그 요청을 모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교장이라고 했다. 글쎄, 교장이라면 그렇게 ‘사소한 일’ 외에도 아주 중요한 일을 많이 하고 있지 않겠는가.

 

  상급 관청으로부터 새해의 주요 목표를 통보받은 후에 새 학년도 목표를 세우고, 어떤 지시․명령을 해야 할지 구상하고, 교직원들을 어떻게 조직해야 권위가 확립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지 결단을 내리는 것이 교장의 주요 업무가 아닐까, 아니 그런 것쯤은 교감에게 위임하고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는 것이 大교장이 보여줄 수 있는 느긋함이 아닐까?

 

  어쭙잖은 경험에 따른 케케묵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이번엔 등하교 이야기가 나왔다. 핀란드에서는 교사가 정하는 수업내용과 시간 운영 계획에 따라 등하교 시각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우리도 따지고 보면 교사가 정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운동회 날은 특별한 날이니까 몇 시까지, 소풍가는 날은 조금 늦게, 현장견학이나 수학여행 가는 날은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닦달하여 좀 일찍 출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그 교사도 “음, 음……” 하며 구체적인 예를 열거하고 있었다. “학습내용, 학습활동에 따라서 8시 등교 오후 3시 하교, 9시 등교 오후 4시 하교, 10시 등교 오후 1시 하교, 오후 1시 등교 오후 5시 하교……”

 

  공교롭게도 그 교사를 만난 다음날 신문에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조사 결과를 인용한 등교 시각 관련 기사가 크게 실렸다. “학생 73%가 반대하는 9시 등교 서울도 강행할까?”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학생들의 건강권과 수면권을 보장한다는 취지로 도입한 ‘9시 등교제’를 서울에서도 시행하려고 하자 논란이 일게 된 것이다.

 

  의아한 것은, 교사(79%), 학부모들(82%)의 반대는 학생들보다 더 심하다는 것은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 이유에 중점을 둔 기사는 찾기 어려웠다. 한국교총에서는 “9시 등교를 하면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이 줄어들고, 하교 시간이 늦어져 학원 시간까지 줄줄이 늦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층은 일찍 출근하는 맞벌이 부부라는 것만 나타나 있을 뿐 교사들의 생각은 보이지도 않았다.

 

  결정 방법에서도 그렇다. 지난해 11월, 조희연 교육감은 “학교별로 학생․교사․학부모가 참여하는 대토론회를 거쳐 올 신학기 도입 여부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라”고 밝힌 바 있으나, 신문을 보면 각 초․중․고교별로 조만간 운영위원회를 열어 도입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업에 관한 일이면 당연히 누가, 왜, 어떻게 그 결정에 참여해야 하는지, ‘수업방법’ 결정에 관한 분명한 관점과 논의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당연한 그 논리를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상대편 주장 혹은 결정에 대해 좋은 점을 찾기보다는 “저렇게 나오면 어떤 점을 비판, 공격해야 할까?” 습관적으로 그 생각부터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구심을 갖게 된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면서도 “핀란드식으로 하면 큰일난다!”는 비판을 이미 준비해 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두 가지를 털어놓아야 하겠다.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는 언제 산적한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을까 싶은 아득함을 느끼게 되고, 핀란드에서는 모든 정책들을 상식적․보편적 수준에서 논의, 결정함으로써 수용하기가 순조로운데 비해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등교 시각 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무슨 법(法)을 정하듯 어마어마하게 다루어도 결과에 석연치 않다고 하는 사람이 많고, 핀란드에서는 비르바 라이사넨이라는 일개 교사도 전문성, 자율성, 책무성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결정하면 그만인 수업 방법(方法)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신문에는 이렇게 실리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글자 한 자 바뀌지 않았지만 제목은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등교시간 상식수준에서 논의해야"

  나는 내 이름으로 이런 제목이 달린 것에 대해 많이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블로그에 실어둘까 말까 망설이다가 내 글이고 내 블로그니까 사실대로 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이 바뀐 것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는 메일을 보냈지만 답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기자님!

  오늘 신문에 실린 제 원고의 제목을 보고 이 메일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100회 이상의 원고를 쓰면서 어느덧 이 신문에 대해 애착심, 자부심 같은 걸 느끼게 되었고,

  제 이름보다는 신문의 이름에 누를 끼쳐서는 안될 것이라는 책무성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제가 아무래도 둔재이기는 하지만 그 둔함을 초고를 써서 40~50회 정도로 고치고 다듬어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신문에 실린 제목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하루종일 생각하다가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고에 붙인 제목 "등교시각 정하는 법, 혹은 방법"은 "등교시간 상식 수준에서 논의해야"로 바뀌었습니다.

 

  시각과 시간은 그 뜻이 다르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혼용하기도 하지만, 학교에서나 교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신문에서는 독자들이 이해하는 수준에서라면, 보다 정확한 표현을 지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으로, 등교시간을 "상식수준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표현은, 교육계에서 받아들이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교육청이나 다른 교육기관에서 "지금의 논의가 상식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지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신문사(데스크)에서는 제가 생각하는 이런 면보다는 더 폭넓고 깊이 있는 논의를 거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으며, 그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당연한 일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원고를 수십 번 고쳐쓰는 필자의 노력도 감안해 주셔서 한번쯤 연락을 주시면 추가적인 의견이라도 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등교시각 정하는 법, 혹은 방법"이라는 제목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등교시각을 법률을 정하듯 한다는 의미와 함께

  교육선진국인 핀란드에서는 교사가 교육방법적인 측면에서 정한다는 의미를 갖게 하는 제목으로 설정한 것이며,

  일반독자들에게는 친숙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제 이 신문의 '오피니언'에서는 이런 제목도 더러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점,

  칼럼을 읽는 독자 중에 누군가 고개를 끄덕여주는 이가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한 제목이었습니다.

  주제넘은 말씀이지만, 저는 1930년대에 런던통신 칼럼을 썼고, 그 글들이 오늘날에도 수없이 읽히고 있는 버트런드 러셀을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메일을 드리고 나서도 혼자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은, 앞으로는 제가 "어떻게" 제목을 붙여야 좋을지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모르고 있는 점을 알려주시거나 다시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말씀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