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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의사 출근(擬似出勤)

by 답설재 2014. 10. 16.

 

 

 

 

 

의사 출근(擬似出勤)

 

 

 

 

 

아침나절에 흔히 전철역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다보는 풍경

 

 

 

 

 

  아침마다 집을 나섭니다. 퇴임 후 5년째입니다.

 

  사무실까지 한 시간 반쯤, 남들처럼, 예전처럼, 서둘러 나서고 걷고 합니다. '소풍가듯 하자'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제때에 나오지 않았다고 원망할 사람이 없는데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게 정말일까?' '정말 그럴까?' 『시지프의 신화』에서 본 그 구절을 생각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권태……

 

 

 

 

 

 

  무대 장치가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 전차,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일, 식사, 잠,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러한 길은 대개의 경우 쉽사리 이어져간다. 다만 어느 날 「왜」 하는 물음이 고개를 들어 놀라움에 물든 이 권태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행위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1

 

  까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부조리한 논증을 시작하는 부분에 있는 문장입니다. 예전에는 이 부분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지겹기도 하지. 이런 하루하루, 끝없이 진행되는 이 생활……'

  그렇게 하여 삶의 무의미함을, 진정으로,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그 회의가 발전(?)하면 드디어 '자살'에 이를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까뮈는 "권태는 그 자체 속에 무엇인가 진저리나게 하는 것을 지니고 있다"고도 했지만 "자각 끝에는 시간과 더불어 자살 또는 재기(再起)라는 결과가 온다"고 했고, 더구나 "여기서 나는 그 권태가 좋은 것이라고 결론지어야만 되겠다"고까지 했는데도 저 "월 화 수 목 금 토" "권태" "기계적인 생활" "의식의 운동" "자살" "진저리" 같은 단어에만 눈길이 갔고, 그 문장 속에 저렇게 "재기(再起)" "권태는 좋은 것"이라는 말을 넣어 둔 것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까뮈가 그 에세이를 왜 썼는가 생각해보면, 간단합니다. 이렇게 끝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2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내버려 둔다! 우리는 언제나 그의 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인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뛰어난 성실성을 가르쳐 준다. 그도 역시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3 그 후부터 주인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불모의 것도 하찮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산의 금속적인 빛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로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여기 이 사무실에 나오는 것을'출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야 했고, 한 시가 급한 일이 많았고, 나 때문에 나라가 휘청거릴 리는 없지만 내가 보이지 않으면 찾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그때의 습성대로 움직입니다. 심지어 밥도 부지런히 먹습니다. 고쳐야 할 것입니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며 '내일부터는 나오지 말아야지'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지내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까뮈는 이렇게 썼습니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 속에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불행보다도 강한 무엇이 있다. 육체의 판단은 정신의 그것과 다름 없는데, 육체는 소멸을 꺼리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을 얻기 전에 먼저 살아가는 습관에 빠지게 된다. 나날이 죽음을 향해 우리를 재촉하는 이 경주 속에서 육체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우선권을 지니고 있다.4

 

 

 

 

 

 

  더러 아내가 나보다 먼저 집을 나서기도 합니다. 때로 나는 베란다에 나가 서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가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는 나를 귀찮게 여겨, 내가 없어지면 홀가분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가 잘 다녀오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렇게 다볼 수 있는 날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까뮈에게, 이런 내 모습도, 지금도 바위와 함께하고 있을 저 신화 속의 그 인물에 비유할 수 있는지 묻고 싶지만, 그러나 언젠가 나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나의 아내도 그렇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나오지 못했을 수도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추가적으로'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고맙긴 한 일입니다.

 

 

 

 

 

 

 

 

 

 

 

 


  1. 알베르 까뮈/이가림 옮김,『시지프의 신화』, 문예출판사, 1999, 22쪽. [본문으로]
  2. 이 책의 마지막 부분(163쪽). [본문으로]
  3. 「이렇게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나의 고령과 내 영혼의 위대성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이 좋다고 판단하게 한다.」이렇듯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처럼 부조리한 승리 형태를 제시한다(이 책, 162쪽). [본문으로]
  4. 알베르 까뮈, 민희식 옮김,『시지프의 신화』, 육문사, 1993, 20~2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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