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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여담(餘談)

by 답설재 2014. 9. 19.

 

 

 

 

여담(餘談)

 

 

 

 

 

 

 

 

 

 

 

 

  회의를 마치고 하는 식사에 빠지는 사람은 '꼭' 빠져 집으로 가는데 나는 '꼭' 참석하는 쪽입니다.

 

  회의는 산뜻하게 진행되기가 어려운 것이긴 하지면, 한두 명은 으레 늦게 할 말이 많이 생각나서 열을 올리고, 게다가 어떤 사람은 핵심도 없는 얘기로 중언부언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주관하는 사람이 나서서 식사하면서 더 이야기하자고 해야 그 자리가 '정리'됩니다. 정작 식사하는 자리에 가면 열을 올리던 사람은 없고 따라서 회의 주제가 식사 자리의 화제(話題)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화제는 "예전에 내가 그 일을 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무용담(談 : 대부분 나이든 사람이 주름잡는 화제), 세상의 형편없는 일들(예를 들면 참 한심한 정치인 혹은 어처구니없는 사건·사고), 교양·오락·여행, 골프, 군대 그리고 더러 축구, 직장 상사(허접한 교장 등) 같은 것들입니다. 더 있습니다. 여담이니까 무슨 얘긴들 못하겠습니까? 낮에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의 옆자리 여성 두 명은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댔는데, 여름에 독일을 다녀온 여성이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한국의 여름 같지 않은 그곳 날씨에 끊임없이 감탄(?)을 해댔고, 상대편은 끈질긴 노력으로 놀라워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 감탄, 놀라움대로라면 지난여름 독일에는 한동안 빙하기가 도래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 이 세상이 허접하게 보이는 것은 그 허접한 여인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백하면, 나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무용담을 좀(아니, '매우'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형편없는 일들' 같은 건 가능한 한 자제하여 언급을 회피하는 쪽인데, 그건 우리 사회의 까칠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먹으로 바위치기가 아닐까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무용담은 앞으로는 절대적으로 자제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이 다짐은 웬만해선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마음대로 하라면 '독차지'하고 싶은) 화제도 있습니다. 그건 요즘 말로 하면 '인문학'쪽인 것으로, 그 중에서도 '독서'에 관해서입니다.

 

 

 

 

  독서! 그 영역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하면 "그런 거라면 좋겠네!" 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문제꺼리"입니다. "독서!" 하면 나로서는 입을 "닥치고" 있을 까닭이 없고, 끼어들지 못할 부분이 없는 것 같고, 하여간 독서의 모든 면에 대해 할 말이 수두룩한 느낌인데, 나의 그런 입장을 상대방은 전혀 인정해주고 싶지 않은 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독서! 내가 만나본 교수들 중에는, 그건 자신들의 전유물이어야 속이 편할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아니, "독서는 당연히 나의 영역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듯했습니다. 으레 "우리 국민은 책을 사지 않는다!" "너무나 책을 읽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하든지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고는 책읽기가 화제가 되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책을 읽지 않았으므로 좀 가만히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순신에 대해 내가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 하더라도 『난중일기』도 『징비록』(류성룡)도 『칼의 노래』도 거의 아무것도 읽지 않은 것이 분명한 그 교수의 말(강의)을 듣고 앉아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징비록』의 이순신이나 『난중일기』의 이순신을 이야기하면, 그 교수는 무슨 얘기로든 내가 이야기한 시간의 두세 배를 할애해서 이야기해야 적절한데 ― 그의 권위가 유지되는데, 그 두세 배 시간 후에 내가 또 "토"를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짐작할 수 있는 그대로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특히 그와 나 사이에는 마치 내가 그의 권위를 강탈이나 한 것 같은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뭐 하려고 하필 책은 읽어 가지고…… 책 이야기만 나오면 "오늘 너 잘 만났다!"는 식이어야 직성이 풀리니……

 

 

 

 

  오후에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갑니다. 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고 가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식사를 하고 들어오겠다고 아내에게 이미 통보한 상태입니다. 그런 기회를 어떻게 놓치겠습니까?

  다만 오늘은 여담을 좀(혹은 '아주') '소극적으로' 할 작정입니다.

 

  무용담.

  그것은 폐해는 잘 알면서 실천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아예 그만두겠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에 의하면 무용담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주 지겨운 일곱 가지 인간 유형 중 한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좀 길어서 '무용담' 부분에 밑줄을 치겠습니다.

 

 

 

 

 

 

  …(전략)…

  그가 그 두꺼운 책 중의 「지겨운 사람들에 관한 연구」라는 글에서 밝히기를, 지겨운 사람이 되는 갖가지 방법들과 그것을 피하는 방법들을 정리해 일곱 권으로 된 학술논문을 쓸까 생각 중이며, 그 일곱 가지 부류 중, ▷ 계속되는 변명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 지나친 근심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 스포츠 이야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라고 했는데, 딴에는 삶의 지혜의 한 가지로 변명을 일삼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걱정도 팔자”라거나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라는 속담이나 우스개가 있듯이 이 세 가지 유형은, 아무래도 연구를 할 필요조차도 없는, 즉 따로 언급할 가치가 전혀 없는 부류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영국 철학자)는 현학적인 태도로 지겹게 하는 사람의 완벽한 본보기이고(얼마나 현학적인 태도를 가졌기에……), ▷ 일화들을 들먹이며 지겹게 하는 사람은 보통 추억에 잠긴 나이 지긋한 신사들로서 그들은 이렇게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자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이런 일이 생각나는구먼.” ▷ 또 여섯 번째의 허풍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들은 어떤 본성을 지녔기에 그렇게 자화자찬을 하는지에 따라 다시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흔한 부류는 ‘속물’이라고 했으며, ▷ 마지막이자 최악의 부류는 지나친 활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들로, 거의 예외 없이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러셀이 현학적이어서 사람을 지겹게 하는 유형으로 허버트 스펜서를 예시한 것처럼, 저도 “러셀의 이 정리는 정말로 그런 것 같다!”면서 이 일곱 가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예를 일일이 들어보고 싶지만, 만약 실제로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일곱 명의 원수를 만들거나 최소한 “좀 만나자!”는 전화를 받게 되거나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저도 자신을 최소한 저 일곱 가지 유형에는 속하지 않는 걸로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도 자기 자신을 저 일곱 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이나 그 유형들에 속하는 인물로 간주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최소한 이렇고 저런 인물이 되지는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어느 글을 읽으며 ‘이 글을 쓴 필자가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닌가!’ 싶은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말이 나왔으니까 좀 빙 돌려서라도 예를 들고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 후배(‘영원한’ 후배)는 다 같은 교육부에서 근무하며 그 흔한 일화(逸話) 하나 만들지 못한 머저리들이란 듯 만날 때마다 자신이 겪은 일들을 무슨 무용담(武勇談)처럼 들려주는 선배님이 더러 계시는데, 사실은 그 이야기들은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어서 듣고 앉아 있는 시간이 난감하고 따분하고 싫어서 속으로는 ‘이러니까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이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겠구나.’ 싶기까지 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후략)…

 

 

 

 

 

 

 

 

  간단한 일입니다.

  나로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저 독서에 관한 화제에만 미련을 버리면 즐겁고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읽지 않아도 좋을 사람이 '비교적' 많이 읽었다면, 많이 읽지 않았지만 많이 읽는 것처럼 얘기해도 좋은 학자 앞에서는 그냥 듣고만 있으면 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교수 앞에 앉아 있었대학생들처럼. 4년간 거의 듣기만 하면 되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처럼.

 

  아예 "책 읽는 이야기라면 교수에게도 지고 싶지 않다!" "책읽는 방법 얘기도 그렇다!"고 초장에 큰소리를 쳐서 기선을 제압해 놓는 방법을 써볼까 싶기도 했지만, 뭐 그럴 것까지 있겠나, 그건 그야말로 웃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애쓰지 말고 그냥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나, 싶은 것입니다.

 

  이런 점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교수는 나를 별로 존중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학자도 뭣도 아닌 나는 당연히 그를, 그의 설명(여담)을, 존중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간에 '레벨'이 달라서 그는 읽지 않아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는 읽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읽었을 리가 없기 때문에 그가 이야기할 때 맞먹으려고 하거나 토를 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식사는 편안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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