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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든 책

내 이름이 처음으로 실린 책

by 답설재 2014. 7. 9.

 

 

 

 

중학교 입시에서부터 낙방을 하고 읍내 사립 중학교에 보결1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일부 교실과 운동장만 현대식이었지 교무실과 서무실, 대부분의 교실, 강당 등이 모두 옛날 향교 건물이었습니다. 농담이었겠지만 학교에 불이나 났으면 좋겠다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정말로 불이 나서 조선시대에 지어진 그 훌륭한 목조 강당 건물이 순식간에 홀딱 타버렸습니다.

학교 일이라면 교장선생님보다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나서고, 게다가 우리에게 한문도 가르치는 서무선생님마저도 멀찌감치 서서 "허 참! 허 참!" 하는 동안,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구경만 했고, 소방차가 오기는 했지만 이미 상황이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후여서 "접근금지!"만 외치고 있었습니다.

 

몇몇 학생들은 그 우람한 강당 건물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저 불이 교실로 옮겨 붙어야 하는데,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한탄(?)했습니다.

 

 

 

저 시뻘건 표지를 보니까 갑자기 불 구경하던 그 밤이 생각나서 그 이야기부터 썼습니다. 중학교조차 보결로 들어간 주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일"은 여러 가지였지만, 걸핏하면 읍내 서점에 가서 눈에 띄는 대로 책을 읽은 일은 그 중 고급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서점 저 안쪽 귀퉁이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혹이나……' 하고 넘기다가 102~103쪽에 실린 내 글을 발견했습니다. 구차한 이 이름이 처음으로 실린 책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서점에서 살다시피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의기양양하게 살아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혹이나……' 하고 살펴봤다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동시를 지어 오라는 숙제가 있어서 고민을 하다가 사랑방에 자주 오는 동네 어른 한 분이 "무지개로 낚싯줄을 삼고, 초승달로 낚시바늘을 삼았다"고 말한 이백(李白)의 고사를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나서 '그거다!' 하고 써낸 것이 그 시골에서 저 먼 어떤 곳의 신문사로 보내졌고 마침내 그 신문사 백일장에 걸려들어 그걸 써낸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월요일 아침, 수백 명의 전교생이 운동장에 다 모인 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교장선생님(성백헌?)으로부터 상장과 상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동시가 이 책에 실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그 '동시'는 일단 「교육시보」라는 신문2에 실렸는데, 나중에 이 책에도 소개된 것입니다.

단기 4293년, 값 500환이라……

 

당장 뭐라고 하기가 어려운 느낌이 가슴에 어립니다. 그런 시절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미 고백했지만 '나의' 이 동시는 '표절'이었습니다.

 

 

초생달과 은하수

 

하늘은

파아란 연못,

그 속에 떠 있는 초생달은 낚시,

그 속에 걸쳐 있는 은하수는 그물,

누가 띄웠을까요.

서산으로 꼬리감춘,

햇님이 띄워 놓고 갔을거야.

 

 

초생달을 낚시로 삼았다면 하늘은 당연히 연못이고 은하수는 그물쯤이 아니겠습니까? 나머지는 …… 뭐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머지 이야기는 꺼낼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무지개가 낚싯줄이라는 것까지 아예 몽땅 훔쳐 오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것입니다.

 

 

 

처음부터 '표절'을 한 주제에, 말하자면 처음을 표절로 장식한 주제에, 그래도 할 말이 있다면, 그러니까 그 씻을 수 없는 경험으로 한 마디 한다면,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나 글을 심사해서 선정하거나 당락을 결정하는 분들은, 표절에 대해 좀 엄격한 관점을 가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 단기 4290년대부터 서기 2014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직 얼마동안 더 살아 있을 그 기간에, 걸핏하면 '표절' 생각을 하게 되는 죄의식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표절을 해보지 않은 멀쩡한 분들은 잘 모를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잠시 가벼운 생각으로 그렇게 써낸 잘못도 잘못이지만, 왜 심사를 그렇게 해서 이렇게 살도록 했느냐는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살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을 이렇게 평생에 걸쳐 붙잡고 놓아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 전에 논의할 일도 있긴 합니다. 거의 해마다 돈을 주고 논문을 마련한 '가짜박사' '가짜교수'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우리 같은 무지랭이가 무슨 표절 이야기를 하겠습니까만, 어떤 것이 표절이고 표절이 아닌지, 관례라는 건 뭘 의미하는 건지,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건 엘리트들이 걱정할 주제여서 이런 식으로 덤벙댈 일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마다 이야기만 하고 넘어가서 될까 싶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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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결 : 빈 자리를 채움.
2. '주간(週刊)'인지 '월간(月刊)'인지는 모르겠고, 그때 내 글이 실린 그 신문이 푸른색 잉크로 인쇄된 걸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