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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작별(作別)

미안한 봄

by 답설재 2014. 5. 2.

 

 

 

 

 

 

더러 전화 연락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의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주 연락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건강은 괜찮습니까?"

 

뭐라고 대답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까?

그 인사가 의례적인 것이라고 해서 이럴 수는 없잖습니까? "왜 묻습니까? 안 좋다면, 무슨 좋은 수가 있습니까?"

 

그럴 땐 망설여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필이면 건강을 묻다니…… 

좀 만만하다 싶은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해 보기도 했습니다. "뭐, 별로입니다. 병원 신세를 진 이후에는 상태가 오락가락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대답이 실제로는 대화만 어렵게 하는 공연한 짓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상대방의 응답이 어색해지고 괜히 쓸데없는 대화가 이어져야 하기 때문에 의례적인 인사에는 의례적인 대답이 제격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얼른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럭저럭 잘 지냅니다." (혹은) "예, 괜찮습니다." (혹은) "아, 예. 좋습니다!"

 

의례적인 진도(進度)가 좀 더 나간다면 이런 대답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잘 지냅니다."

 

 

 

 

 

 

더러 이런 생각도 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 내 목소리를 들으며 아, 아직 죽지 않았구나, 할 수도 있겠지?' (혹은) '언젠가 이 사람이 내게 또 전화를 했을 때, 내가 직접 받지 못하고 마는 날이 오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던 4월 초순 어느 날, 고개들 돌려 뒤뜰의 은행잎이 '갑자기' 저렇게 곱게 피어난 걸 발견했습니다.

'아, 올해도 다시 봄이 완연하구나. 그래, 사실은 이만해도 괜찮은 거지. 다시 이 좋은 봄을 맞이했으니……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예전 같으면 분명히 죽었을 병인데 이렇게 펄펄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 그래, 이만해도 괜찮은 거지…………'

 

 

 

 

 

 

그러던 것이 요즘은…… 좀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퇴임한지 몇 년 되긴 했지만 나이가 아직 그리 많은편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올봄에는…… 세월호 참사 뒤로는 날이갈수록 뭐랄까…………

 

망설이고 우물쭈물할 것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어쩔 수 없긴하지만 미안하고 어색합니다."

 

 

 

 

 

 

이런 생각을 언제까지 하게 될는지, 아니면 기한도 없이 내내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게 될는지 그게 의문입니다. 참 하릴없는 생각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공연히 문득 떠오르는 이 노래를 부르며 지냅니다. 아니 '부르지 않고' '부른다기보다' 마음속으로만 부릅니다. 하필이면 왜 이 노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아무것도 모르고, 미안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지내던 4월 초순의 그 일상이 그립습니다. 뭐 특별히 좋을 일도 없었던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따뜻하고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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