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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작별(作別)

좀 더 큰 어떤 다른 세상

by 답설재 2014. 6. 13.

 

 

 

 

 

 

『현대문학』에 미술가 이우환 선생을 인터뷰한 글이 연재되었습니다. 올해 1월호부터 4월호까지였고, 프랑스에서 미술비평 및 예술부 기자로 활동하는 심은록이라는 분이 쓴 글이었습니다. 1월호에서는 54쪽, 2월호 50쪽, 3월호 55쪽, 4월호 45쪽이었고, 매번 흥미진진하게 읽으면서 4월호를 끝으로 연재가 끝난 것이 섭섭해서 '느닷없이' 끝난 것 같은 축제, 한동안의 축제가 지나가고 그 이튿날 다른 계절이 시작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1

 

이우환이 누군가, 설명을 좀 해보는 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고, '괜히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세계적 예술가'가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고만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과 나는, 하는 일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더러 뭘 좀 아는 척하며 지낸 자신이 쑥스러워집니다. 사람이 못나고 이게 한계여서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하기야 나만 그런 건 아니지만…….

 

 

 

 

 

 

3월호에는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심 : 그런데 유럽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많은 지성인들이 클래식을 상당히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세 번째 단계의 어떤 범감각적인 감각이 발달되지 않은 이유는, 아니 오히려 축소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 많은 철학자들이나 지성인들이 이성적으로 자꾸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칸트나 라이프니츠도 순수이성을 비판하면서도 이성적인 것이 앞섭니다. 그래서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그쪽으로 몰고 가기 때문에 범우주적이고 범감각적인 것이 왜소화되고 축소화됩니다. 가령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관 같은 것을 보면 우주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단지 발목 혹은 잘린 팔의 일부분만을 보아도 엄청나게 큰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집트 예술에서 제일 감동적인 부분은 미라라든가 죽은 사람을 저 세상에 보내는 배에 사공들이 쭉 타고 있는 작품에 들리지 않는 심포니가 있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뭔가 이 세상이 아닌 좀 더 큰 어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그런 예감을 주거든요.

 

바흐는 베토벤처럼 장엄하거나 찬란한 그런 건 없지만 정결하고 숭고한 맛이 있다는 얘기, 조각이나 회화에서도 구체적으로 그려진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봄으로써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다섯 페이지 정도 이어지다가 나온 대화였습니다.

 

 

 

 

 

 

이 대화를 설명하거나 하는 것도 영 쓸데없는, 결례일 것입니다. 저 파라오의 표정이 생각났다는 것만 덧붙입니다.

어느 신문에서 보고, 조잡하게 복사한 것이라도 자주 보겠다고, 마음에 물결이 일 때마다 얼른 고개를 들어 바라보겠다고, 드나드는 문간에 붙여 놓고는, 그것조차 실천하지 못한 것을 반성했습니다.

 

그때, 그 결심을 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파라오에 대한 경배」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8194).

 

자주 생각합니다.

마음을 부드럽게 가져야 하고, 우선 나 자신에게 그렇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으로 이 사진을 떠올리게 됩니다. 세상에는 나 아니어도 좋은 일뿐이고, 내가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는 일들뿐인데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러므로 우선 나 자신에게 좀 호의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소인배니까 우선 나 자신에게부터 잘 대해 주고, 혹 그게 넘치면 남에게도 조금 잘 대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이 마음이 편해지면 표정도 좀 편해질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아마 미련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고, 나 자신을 대하는 것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띄는 것들, 들려오는 것들이 마음을 어지럽게 했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경우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나와 옷깃을 스칠 일도 없이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에 떠오르기만 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어지럽게 할 때도 흔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가령 며칠 전 이 블로그에서 인간쓰레기 취급한 그 목사가 나에게 욕을 얻어먹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부디 마음을 너그럽게 하자. 제발 좀 그렇게 하자……'

 

 

 

 

 

 

결국 내가 경청하였던 대가들로부터, 그 사상을 읽어보았던 철학자들로부터, 조사해보았던 사회들로부터, 그리고 서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과학자들로부터 나는 무엇을 배워왔던가?

 

그때 그 글에 덧붙였던 『슬픈 열대』(레비-스트로스, 한길사, 738쪽)의 한 문장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 파라오의 상을, 그것도 제대로 스캔한 사진도 아닌 걸 복사해서 붙여놓고 경배니 뭐니 하며 그러느냐고 할까봐 아주 '쎈' 학자의 문장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1. '양의(兩義)의 예술-이우환과의 대화 그리고 산책'은, '초월적-돌과 철판의 역사', '시詩적-점과 여백의 역사', '비판적-예술가들의 역사', '양의의 작가-그리고 시詩적 전환을 위하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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