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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작별(作別)

귀신은 아무래도 있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

by 답설재 2014. 6. 26.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 것 같긴 하지만 아무래도 귀신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런 말을 들을거라면 뜸을 들이는 것보다는 내친김에 이야기하고 말겠습니다. 귀신조차 없다면 영 재미가 없을 것 같고, '귀신제도(鬼神制度)'가 있어야 잘하면 귀신 중에 격이 제일 낮다는 저승사자 정도는 한번 해볼 수도 있을 것 아닌가 싶어진 것입니다.

 

저승사자는 초짜 귀신이 한다는 게 정설(定說)입니다. 게다가 저승사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입장에서 보면 다 면식범(面識犯)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어디에 사는 아무개를 데려오라!" 하면 얼른 "그 사람이라면 제가 잘 압니다.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하면 될 것입니다.

 

'귀신은 없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있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은, 그동안 막연하게 해오다가 소설 한 편을 읽으며 '아무래도 있는 게 낫겠다!'는 확신 같은 걸 갖게 되었습니다.

 

삼촌은 어제 집을 나간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밴드 멤버 오디션을 보러 오겠다는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머리가 길고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노크도 없이 쑥 들어와 소스라치게 놀랐다.1

 

 

 

이렇게 시작되면 십중팔구 저 삼촌이 뭘 좀 해보려는 조카를 괴롭히게 될 것은 '보나마나'입니다. 삼촌은 조카에게 빌붙어 숙식(宿食)을 해결하고, 그나마 가만히 좀 있으면 좋을 텐데 차츰 이것저것 자꾸 괴롭히기 시작하고, 드디어 파렴치한 짓을 일삼고, 그러다가 조카를 파멸로 이끌면서 소설은 막바지에 이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그 조카를 찾아오는 것이 삼촌만이 아닙니다.

 

불쑥 찾아와 자신의 불우와 불운을, 고독과 빈한함을 하소연하다가 흐느껴 울고는 볼일이 다 끝났다는 듯 쌩한 얼굴로 돌아가는 그것들, 또다시 찾아와 똑같은 이야기와 울음을 반복했던 그것들. 그것들을 영혼이나 유령, 귀신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또 어쩌면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에 찾아온 그것이 사람인 척하고 소파에 척 앉았을 때, 난 정말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인 줄 알았다. 악기도 없이 몸만 온 그것이 노래도 하지 않고 제 이야기만 술술 풀어놓는데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하고 거기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것이 갑자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기묘하게 차가워져 있었고 시간의 흐름도 이상했다. 그것들이 나타나면 시간이 제멋대로 흘렀다.2

 

이미 귀신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렇지, 처음에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정말이지 "그것"이라고 하는 것이 귀신일 줄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음악에 미친 사람이 오디션에 빠져 기를 쓰니까 "그것"이니 뭐니 하는 건가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더 읽어나가다가 '아! 이건 진짜 귀신 이야기구나!' 한 것입니다.

오죽하면, 얼마나 몰입했으면,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오디션을 보러 오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빠져드는 것이 어디 음악뿐이겠습니까? 모든 것이지요. 사람들은 그 모든 것 중의 한두 가지에 빠지게 되고, 그렇게 빠지면 다시는 빠져나오기 힘들어지고, 그러다가 죽고, 죽어가면서도 팽개치지 못하여 귀신이 되어서도 오디션이니 뭐니 하는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사실은 저 삼촌뿐만 아니고, 화자(話者) 역시 귀신입니다. 그 삼촌이, 삼촌의 영혼이, 조카를 데리러 온 것입니다. 리우로 가자며, 꾸꾸루 삼촌이, 삼촌의 영혼이, 저승사자가 되어 찾아온 이야기입니다.

 

나는 삼촌이 이곳을 떠난다고 할까 두려웠다.

아니야, 괜찮아. 이제는 그것들이 무섭지가 않아. 삼촌이랑 있으니까 괜찮아졌어. 삼촌, 그냥 여기서 함께 지내. 가지 마.

삼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가 이곳을 못 떠나는 건 네 의지가 아니야. 그것들의 이야기가 너를 무겁게 만들어서 못 떠나는 거야. 그것들은 너한테 모든 걸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어. 넌 그냥 희생양이야. 네가 그걸 알아야 해. 그러니까 우리 함께 리우로 가자. 어려울 것 없어. 그냥 여길 나가면 돼. 넌 여기가 가장 안락한 곳이고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떠나고 보면 알 거야. 어서 나가자. 그것들에게 네가 들었던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면 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문을 나서기만 하면 돼.3

 

그렇지 않을까요? 무슨 미련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무얼 더 걱정해야 하겠습니까? 저승 가는 길에 비행기를 탈 것인지, 열차를 탈 것인지, 걸어가기 싫으면 하다못해 자전거라도 탈 수 있는 건지, 그런 걱정도 다 부질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회사는 누구에게 물려 주어야 할지, 이 나라 교육이 도대체 어떻게 되려는 건지, 그런 걱정도 다 필요없고, 다 잊고 잊어버리고, 저 저승사자, 면식범 '꾸꾸루 삼촌'을 따라 나서기만 하면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가지 희망사항이 있다면, 저승이나 저승사자를 묘사할 때 좀 제대로 해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가령 저승사자를 그릴 때 사람들은 걸핏하면, 아니 덮어놓고 옛날식 검은 모자에 검은 도포를 입고, 얼굴에는 흰색 화장품으로 떡칠을 해서 도무지 정(情)이 들 것 같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내고, 심지어 영화에서도 그렇게 분장한 저승사자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사람은 다 죽는다"기보다 "재수 없는 사람은 죽는다"는 의식, 그렇게 죽어서 "저렇게 생긴 저승사자에게 붙잡혀 간다"는 의식, 그러니까 죽음과 저승을 좀 우습게 보는 관점으로 무책임하게 그런 묘사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하루빨리 그런 경향을 탈피해서 좀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묘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아무리 저승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곳도 다 사람 사는, 아니 "사람 사는"은 아니라 해도 그곳도 다 영혼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인데 어떻게 그렇게 정나미가 떨어지는 모습을 한 것들만 있겠습니까!

더구나 버트런드 러셀은, "소수의 성자들은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성자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은 지겨워 죽을 지경일 것"이라면서, 정의가 존재하기 위해 신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여기에 불의가 존재한다면 나머지 모든 곳에도 역시 불의가 존재할 공산이 크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4 우리가 아는 곳은 이 세계뿐이고 확률적으로 이 세계는 타당한 표본일 것이어서 저승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러셀의 그런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저승에 대해 조금은 더 성의를 가지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곳은, 그저 "특정한 사람은 천당이나 극락으로 가고, 그렇지 못한 주제들은 지옥으로 간다"고 하면 그만인, 그러니까 어느 쪽으로 가는지, 그 자격이나 따지면 그만인 그런 곳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저 시커먼 저승사자를 따라나서는 것이 아니라 좀 오순도순 혹은 서로를 위로하며 갈 수도 있는 곳 아니겠습니까?

 

 

 

결정적인 이야기를 하나 보태겠습니다. 문인수 시인의 '의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의논이 있었다  /  문인수 

생활고와 병고를 견디다 못해 결국세 모녀는 나란히 누운 채 죽었다. 하지만세상을 향한 단 한 마디 원망도 없이, 그저"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짤막한 유서를 남기고 갔다.


헌 냄비엔 이제 라면 대신 안친 번개탄 세 장,한 줌 재 속엔 또한세 모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서로,도란도란 젖으며 짤막하게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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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 등단. 시집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배꼽』 『적막 소리』 『그립다는 말의 긴 팔』 등.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현대문학』 2014년 4월호, 156~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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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소현, 단편소설 「리우로 가자-꾸꾸루 삼촌」(『현대문학』 2013년 9월호, 78~104쪽) 처음 부분. 정소현 : 1975년 서울 출생. 홍익대 예술학과와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2008년 『문화일보』 등단.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 '젊은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수상.

2. 79~80쪽.

3. 102~103쪽.

4. 버트런드 러셀, 최혁순 옮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문예출판사, 2013), 71,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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