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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그림과 사진

우리 선배 편수관 구본웅 화가

by 답설재 2014. 4. 2.

《명화를 만나다―한국근현대회화 100선》전에 옛 편수국의 구본웅 미술 편수관의 작품도 소개되었습니다. 「친구의 초상」. 이상(李箱)이 모델이었다는 바로 그 작품입니다. 이용기 선생님은 뜻도 모를 오감도(烏瞰圖)를 자꾸 읽어 주셨습니다. 벌써 50년이 흘러갔습니다. 지금도 우리들 곁을 오락가락하시며 그 시를 읽어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十三人의 兒孩가道路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선생님! 30년 전인 1935년에 그 이상 시인의 초상화를 문교부 구본웅 미술 편수관께서 그렸습니다. 저는 장차 교육부 편수관이 될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때 그 국어 시간에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지…… 아니면 깜짝 놀라셨을지……

 

 

 

친구의 초상 1935, 62×50㎝,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친구의 초상>은 구본웅의 친구인 시인 이상의 초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어릴 적 부상으로 평생 꼽추로 살았던 그는 사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식이 강했던 이상과 우정과 예술관을 공유하는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당시 구본웅은 조선의 문화를 위하여 사람들이 미적 교양을 쌓아야 하고 기초를 다지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믿었으며 많은 이들과 교류하였다. 그러한 취지에서 구본웅은 문학 동인지인 구인회를 후원하여 1936년 구인회의 기관지인 『시와 소설』을 발간하였고 이때 이상은 편집을 담당하였다. 그 자신이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던 화가였기에 구본웅은 예술가라는 사회의 변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서 저항적 시어를 구사했던 시인 이상을 더 잘 이해하고 서로 예술적 교감을 이룰 수 있었다.

 

이상의 염세적이면서 파격적인 시와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대담한 필치와 어두운 분위기로서 이상의 성격과 예술관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개성을 중요시했던 표현주의의 영향 아래 대상을 간략하게 처리하는 분방하고 힘센 붓질, 대담한 생략, 푸른색의 전체적인 배경 속에서 드러나는 붉은 색의 대비는 그림 그 자체, 나아가 주인공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어딘가를 골똘히 바라보는 인물은 현실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반항적인 예술관을 펼쳤던 이상의 성격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작품은 대상의 외면보다는 내면 세계를 드러내고자 했던 화가 특유의 표현주의적인 예술관에서 비롯되었다.

 

도록 《명화를 만나다―한국근현대회화 100선》(2013, 조선일보사·국립현대미술관) 12쪽에 실린 작품 해설입니다. '작가 약력'에는 화가 구본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화가 구본웅은 "미술 교과서 편찬에도 참여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본웅 具本雄 Ku, Pon-ung 서산 西山

 

1906-1953

 

구본웅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3년 고려미술원에서 이종우에게 유화를 배웠고 1924년 YMCA에서 김복진에게 조각을 배웠다. 1927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서 <얼굴 습작>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였고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화학교에서 1년간 석고데생을 배웠다. 1929년 니혼(日本)대학 미학과에 입학하여 미술이론을 배웠으며 1930년부터 1934년까지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대 표현주의 미술을 비롯한 전위적인 미술에 관심을 가졌고 공모전에 출품하는 것 또한 일본정부 주도의 제국미술전람회가 아니라 전위적인 경향의 이과전과 독립전에 출품하였다. 1930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 이과전에 입선하였으며 1930년 백만양화회, 1934년 신회화협회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5년 이종우, 김용준, 이마동, 길진섭 등과 함께 목일회(牧日會)를 결성하여 화단에 새로운 역할을 이끌었다. 미술비평, 고미술 수집에 있어서도 앞장섰으며 미술교과서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부친이 운영하던 창문사(彰文社) 일을 도우면서 미술 관련 출판에도 관심을 기울여 한때 미술전문지 『청색』을 발간하였고 문인들의 활동에 일조하였다. 작고 후 1974년 시화집 『허둔기(虛屯記)』가 발간되었다.

 

《명화를 만나다―한국근현대회화 100선》전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지난해 10월 29일부터 지난 3월 30일까지 석 달에 걸쳐 개최되었고, 꼭 봐야 하겠다면 이제 부산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봄빛이 찾아들고 있는 덕수궁

 

 

 

화가 이중섭이 돌아오면 뭐라고 할는지… "그렇게 서러워도 돌아보는 이 별로 없더니……" 그의 소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유명하다 하면 몰려듭니다.

 

 

 

 

 

『편수의 뒤안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교육부에서 편수관을 지낸 사람들의 모임에서 편수 업무를 하며 겪은 일들을 써서 발간하는 자료인데 그 창간호에 구본웅 편수관 이야기가 실려 있는 걸 보았습니다.

 

다음으로 初代의 美術 編修官이라 할 수 있는 具本雄 씨에 언급치 않을 수 없다. 그는 日帝時代에 文藝雜誌 靑色紙를 경영하고, 「靑馬詩集」, 金文輯의 「文學評論」 等을 출판한 서울의 名士였다. 그의 叔父는 당시의 初代 京畿道知事 具滋玉氏(被拉)요, 그의 從弟는 景武臺 秘書官 具本俊씨였다. 그리고 그가 鮮展에 油畵를 출품하여 상시 우수하게 당선된 작가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美術敎科書를 편찬하고, 아울러 國定敎科書의 揷畵를 그려야만 했다. 당시 揷畵家에게 삽화를 맡길 만한 겨를이 없어 대개 1인 2역쯤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具씨는 신체 장애자로서 꼽추였다. 이런 신체적 핸디캡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너그럽고 아름다운 心情의 소유자였다. 신사였다. 1·4 후퇴 후 약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일찍 가버린 것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畵筆을 놓고 파이프를 문 채 미소짓던 그의 溫顔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최병칠, 「人生과 敎育」, 『編修의 뒤안길』 창간호(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1991), 5~6쪽.

 

 

다음으로 초대의 미술 편수관이라 할 수 있는 구본웅 씨에 언급치 않을 수 없다. 그는 일제시대에 문예잡지 청색지를 경영하고, 「청마시집」, 김문집의 「문학평론」 등을 출판한 서울의 명사였다. 그의 숙부는 당시의 초대 경기도지사 구자옥 씨(피납)요, 그의 종제는 경무대 비서관 구본준 씨였다. 그리고 그가 선전에 유화를 출품하여 상시 우수하게 당선된 작가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술 교과서를 편찬하고, 아울러 국정교과서의 삽화를 그려야만 했다. 당시 삽화가에게 삽화를 맡길 만한 겨를이 없어 대개 1인 2역쯤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구 씨는 신체 장애자로서 꼽추였다. 이런 신체적 핸디캡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너그럽고 아름다운 심정의 소유자였다. 신사였다. 1·4 후퇴 후 약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일찍 가버린 것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화필을 놓고 파이프를 문 채 미소짓던 그의 온안(조용하고 부드러운 얼굴빛)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최병칠, 「인생과 교육」, 『편수의 뒤안길』 창간호(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1991), 5~6쪽.

 

 

전에 초대 편수국장 외솔 최현배 선생, 이후에 편수국장을 지낸 작곡가 정세문 선생("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내가 직접 그분의 곁에서 편수관으로 일하기도 한 함수곤 선생 이야기도 쓴 적이 있지만, 이처럼 우리나라 교과서 편찬에 공헌한 분들을 생각하면 한때 우리 정부에서 편수관을 지내며 심혈을 기울인 일들이 자랑스러워집니다.

 

더구나 저렇게 화가 구본웅 선생도 한때 그 편수국에서 일했다는 사실, 그분에 대해 최병칠 선생이 저렇게 표현한 부분을 읽으며 이미 다 틀렸겠지만 지금이라도 그 꼽추 편수관 구본웅 선배를 닮아가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너그럽고 아름다운 심정의 소유자였다. 신사였다. 1·4 후퇴 후 약한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일찍 가버린 것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화필을 놓고 파이프를 문 채 미소짓던 그의 온안(조용하고 부드러운 얼굴빛)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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