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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그림과 사진

Thank you, Gauguin !!!

by 답설재 2014. 3. 25.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나? 폴 고갱은 파리 사람인데, 아버지를 따라 페루로 이민을 갔다. 그는 배 안에서 아버지를 잃고 다섯 살 때까지 리마에서 살았다. 프랑스로 돌아와 스물네 살에 증권거래소 직원이 되었다. 이듬해 결혼을 했고, 애들을 다섯 낳았다. 서른다섯에 증권사를 그만두고, 그림을 그렸다. 먹고살기가 힘들었다. 그는 처가 있는 코펜하겐으로 갔다. 그러나 곧 처자식들과 헤어져 파리로 돌아왔다. 마흔세 살 때 남태평양 타히티로 향했다.

두 달 항해 끝에 도달한 파페에테는 술에 찌든 사람들의 황량한 땅이었다. 그는 마타이에아로 옮겼다. 거기서 건강한 원주민들의 삶과 만났다. 가난과 고독이 그를 괴롭혔다. 2년 뒤 그는 귀국했다.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전시했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하지 못했다. 마흔일곱 살 때 그는 다시 타히티로 갔다. 파페에테에서 패배와 좌절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자살을 기도했다. 열대의 밝고 강한 색채들로 그의 비자연주의적 예술을 완성하고, 매독과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쉰다섯에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했다.

문명은 그것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수혜자도 괴롭혔다. 그것에 대한 혐오감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했다. 「두브논 누? 크 솜므 누? 우 알롱 누? Doù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와 「타히티의 여인들」은 그의 고통과 고뇌의 산물이었다. 그는 목숨을 버리고 그것들을 얻었다. 예술과 삶, 둘 다 가질 수는 없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가질 수도 없었다. 예술을 선택하면 삶이 아작났다. 삶을 쫓으면 예술은 물론 없었고, 삶도 뜻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둘 다 가지면 안 되냐? 예술 좀 없으면 안 되냐? 그것 없이 그것 있는 것과 같을 수는 없냐? 그것 없이 삶에 뜻이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고 뜻있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같은 값의 물건이 그것 없는 삶에 뜻을 줄 수는 없냐, 가령 자연이라든가?

…(중략)…

「타히티의 여인들」은 둘 다 옷을 입었다. 연분홍 옷을 입은 여인은 앞을 보고 가부좌를 튼 앉음새고, 하얀 꽃무늬들이 있는 주홍빛 치마와 하얀 소매 없는 윗옷을 입은 여인은 오른팔로 바닥을 짚고 옆으로 앉아서 발을 뻗었다. 둘 다 머리가 검다. 옆으로 앉은 여자는 뒤로 묶은 머리채가 탐스럽다. 파리의 화가가 본 갈색 여인들은 탱화의 여인들보다 더 우악스럽고 더 추상적이었다. 예술가가 한 걸음 앞섰다.

 

―― 서정인(연재소설), 『바간의 꿈』 중에서.1

 

 

 

도록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Gauguin』(한국일보문화사업단, 2013), 103쪽.

 

 

 

우리가 「타히티의 여인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고갱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두 번에 걸쳐 타히티에 가지 않았다면 저 그림이 태어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소설을 읽으며, 아니, 소설 때문에, 새삼스럽게, 그 고갱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고갱이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타히티의 여인들」을 보여주려면 아무리 어려워도 내 한 몸을 희생해야 한다! 내 아내와 자식들도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뿐이었습니다.

 

소설에 의하면,

서른다섯에 증권사를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고,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처가 있는 코펜하겐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곧 처자식들과 헤어져 파리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고,

마흔세 살 때 남태평양 타히티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고,

두 달 항해 끝에 도달한 파페에테는 술에 찌든 사람들의 황량한 땅이어서 마타이에아로 옮겼고,

거기서 건강한 원주민들의 삶과 만났지만 가난과 고독이 그를 괴롭혀서 2년 뒤에는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전시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

마흔일곱 살 때 그는 다시 타히티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그곳 파페에테에서 패배와 좌절로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고,

자살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열대의 밝고 강한 색채들로 그의 비자연주의적 예술을 완성하고는 매독과 영양실조로 고생하다가 쉰다섯에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갱이 희생한 것은 고갱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해서,

그 희생이 당연한 것이라거나 우리가 고마워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하면 정말 무지막지한 생각일 것입니다. 고갱의 그림들이 두고두고 볼 만한 것이라면, 우리는 두고두고 고갱이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가 "까짓거, 다 집어치우고 돈이 될 만한 그림이나 그려 내다팔며 편하게 지내자'고 했던들, 오늘날 우리가 저 그림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큰일날 뻔했다' '참 아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

1. 서정인(장편연재소설 제2회)『현대문학』2013년 8월호(78~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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