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이갈리아의 딸들』
노옥재·엄연수·윤자영·이현정 옮김, 황금가지, 2004, 1판39쇄
'성평등'을 주제로 해서는 잘난 척하지 않는 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나는 성평등에 대해 매우 개방적·진보적'이라는 건방진 말을 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하는 게 낫겠다는 뜻입니다.
"성평등에 대해 개방적·진보적인 사람"이 되는 일은, 죽기 전에는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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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Egalia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습니까? 나 참 아는 척하시긴……
그 나라가 어디 있는지 지구본을 돌리며 두리번거리나 학생들이 배우는 지리부도를 빌릴 필요는 없습니다. 메르카토르 도법(Mercator projection)이나 구드 도법(Goode homolosine projection), 호몰로사인 도법, 몰바이데 도법…… 그런 전문적이고 두꺼운지도책이나 최신판 세계지도를 구해 본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세상에 나온 그 어떤 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 책을 쓴 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에 의하면 전혀 '새로운 세계'의 어떤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정리해 놓은 <이갈리아의 용어들>에 의하면 바로 이런 나라입니다.
이갈리아Egalia 나라 이름. 평등주의Egalitarian와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라는 설이 유력하다. 팔루리아 산맥을 사이에 두고 이웃나라 팍스 Pax와 인접해 있다. 주요 도시로는 이갈선드Egalsund 등이 있고 농업, 어업 등의 주요 산업이다.
자꾸 간섭하는 것 같지만, 평등주의Egalitarian나 유토피아Utopia를 사전에서 찾아보는 것은 당연한 '자유'지만, '팔루리아 산맥'이나 '이갈선드Egalsund'는 찾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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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에 존재하는 이 나라 '이갈리아'에 대해 알아보려면 우선 몇 가지 용어를 알아야 합니다. 작가가 '이갈리아Egalia'와 함께 정리해 놓은 것은 딱 스무 가지입니다.
움, 맨움, 미즈, 미재스…… 아마도 처음보는 이 단어들의 뜻은, 건성으로 읽어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을 가질 수 있지만, 정작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볼수록 ―물론 저처럼 '성평등'에 대해 착각하고 지내온 사람의 경우― 점점 헛갈릴 수도 있습니다.
소설 자체보다도, 아니 적어도 소설만큼은 재미있는 내용들입니다.
* 움 Wom 1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라고 분류되는 성(性)의 인간. 2 어떤 성의 인간이든 인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예를 들어, spokeswom(대변인), seawom(뱃사람). 3 일반적인 인간을 움으로 지칭할 수도 있다.
* 맨움 manwom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라고 분류되는 성(性)의 인간.
* 미즈 Ms 움의 성, 성명 앞에 붙이는 경칭.
* 미재스 Msass (미즈에 맨움형 어미 -ass가 결합한 것으로) 기혼 맨움의 성, 또는 그 아내의 성 앞에 붙여 기혼 맨움을 나타내는 경칭.
* 스피너맨 Spinnerman, Spn 미혼 맨움의 성, 성명 앞에 붙이는 경칭.
* 아내 wife/ 하우스바운드 housebound 움과 맨움이 결혼하면 움은 아내가 되고 맨움은 하우스바운드가 된다.
* 부성보호 fatherhood-protection 움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지목한 맨움이 갖게 되는 혜택과 의무. 어떤 맨움이 어떤 움에게 <(부성)보호>를 받는다면 그 맨움은 움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아이를 길러야 할 의무를 가지며 그 움의 하우스바운드로서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부성보호흘 받는다는 것은 그 움의 하우스바운드가 된다는 의미이다.
* BJ 도나 제시카의 탄생 이전 시대를 가리킨다.
* AJ 도나 제시카의 탄생 이후 시대를 가리킨다.
* 로디 lordy, lordies 1 어떤 맨움을 지칭할 때, 특히 공손함과 존중을 표시할 때 쓰는 말. 2 맨움들에게 말할 때 공식성과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쓴다. 예를 들어 연설을 시작할 때 <Lordies and Gentlewim>이라고 한다.
* 젠틀움 gentlewom, gentlewim 1 높은 사회적 지위의 가문 출신의 움. 2 행동이 바르고 교육 수준이 높은, 세련된 움. 3 움 집단에게 말할 때 젠틀윔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 도나 제시카 Donna Jessica 1 이갈리아인들이 하느님 어머니의 딸이라고 믿는 움의 이름. 그녀의 가르침이 이갈리아인들의 종교의 기초가 되었다. 2 놀람, 충격, 분노 등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이 하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맹세의 말. 예를 들어, <도나!>(빌어먹을!)
* 메이드맨 maidman 젊은 미혼 맨움. 옛날 말.
* 메이드맨의 무도회 maidman's ball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큰 무도회. 움은 마음에 드는 맨움을 선택하고 그 맨움과 함께 <매이드맨의 방>이라는 곳에 가서 사랑을 나눈다.
* 페호 peho 맨움들이 페니스를 받치기 위해 입는 옷.
* 팔루리안 phallurian 맨움 동성애자.
* 맨움해방주의 masculinism 1 맨움도 움이 가진 것과 똑같은 권리, 권력, 기회를 가져야 하며, 평등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이 변화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 2 이 믿음에 근거한 사회 운동.
* 스파크스주의 sparksism 계급 투쟁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클라라 스파크스의 저작에 근거한 정치 철학.
* 휴우미즘 huwomism 종교의 도움 없이 행복과 만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인간 womkind의 능력을 믿는 철학.
* 달러블 dollable 이갈리아의 화폐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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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다면, 남성의 경우, 적어도 양성평등의식으로 보면 분명히 경이로운 인물일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자꾸 헛갈렸고,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수도 없이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이를 보는 것은 맨움이야」 브램이 보고 있던 신문 너머로 아들에게 책망하는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그녀가 화를 참기 힘들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난 지금 신문을 보고 있잖니」 화가 난 그녀는 다시 신문을 읽었다. 「그렇지만 나는 뱃사람이 되고 싶다구요! 난 아기를 데리고 바다에 갈거예요!」 페트로니우스가 당돌하게 말했다.
「그러면 그 아이의 엄마가 뭐라고 하겠니? 안 돼. 인생에는 참아야만 하는 것이 있는 법이야. 때가 되면 너도 알게 될거다. 우리 사회와 같은 민주 사회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을 수는 없는 거야. 그렇다면 엄청나게 지겨울 테지. 삭막하고 울적할거야」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더 삭막하고 짜증나는 일이에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소설의 첫머리인 이 장(章)의 제목은 <브램 장관과 그녀의 가족>입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페트로니우스와 그의 어머니 브램 간의 대화입니다. 흡사 성년이 된 딸과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부모(아버지 혹은 어머니) 간의 일상적인 대화처럼 어머니와 아들 간에 대화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신문 너머로, 남자 주제에 집에서 아기나 키우지 무슨 뱃사람이 되겠느냐며 꾸중을 하고 짜증을 냅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진 아들 주제에 그 따위 발언으로 신문을 보는 어머니를 방해하느냐는 투로 나무랍니다. '가관'인 것은 그 아들은 아기를 데리고라도 뱃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그렇게 하도록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단호합니다. "안 돼." 이어서 '일반론'을 늘어놓습니다. "인생에는 참아야만 하는 것이 있는 법"이라고. 남자는 남자답게 집에서 아기를 키워야 한다고. 그 아이의 엄마에게 신뢰를 받는 남자(맨움)가 되어야 한다고. 지금 우리 사회가 아무리 민주적인 사회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만약 모든 사람이 똑같다면, 즉 남성(맨움)이 여성(움)과 같은 지위를 누리게 되고, 하는 일도 똑같아서 구분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엄청나게 지겨운 일이며 얼마나 삭막하고 울적한 일이겠느냐고.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더 삭막하고 짜증나는 일이에요!」
아들이 반박해 봅니다. 그렇지만 그 반박이 실효를 거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들로서의 억눌린 마음으로 모처럼 큰맘먹고 드러내어본 용기에 지나지 않아서, 결국은 저 단호하고 엄격한 어머니의 훈계를 더 듣거나 더 가혹한 꾸중을 듣지나 않을까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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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 싶습니까? '소설가들이란 참…… 별 희한한 설정도 있구나' 하며 읽으면 되지 않느냐는 뜻입니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가져야 제대로 읽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사실은 내가 지금 이 세계에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참 읽다보면 딴 생각, 말하자면 지금 이 세상, 아무래도 남성이 우위인(정말로 '우위'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여겨지는) 우리 세상에 익숙한 사고방식으로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맨움(남성) 해방운동의 기수가 되고 싶어하는 페트로니우스의 어머니 루스 브램은, 이갈리아의 상황에서 본 가부장제의 문제점, 결코 그런 세상이 될 리는 없지만 맨움(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끔찍함'을 역설하는 것으로 아들의 항변을 일축하면서, 세상을 결코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아들과의 논쟁을 끝내 버립니다.
그녀는 잠시 동안 멈췄다. 페트로니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쪽에서 이렇게 시인하니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책이 완전히 너 자신을 맨움 해방의 대변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페트로니우스. 그런데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라니! 맨움이 계획을 세우고 사회를 통치한다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건 생각할 수 없는 게 <아녜요.> 그런 사회는 존재했었다구요! 단지 우리가 그 사회에 대해 아무것도 들은 게 없을 뿐이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 끔찍한 모권제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존재<했었다>고! 그렇지. 그것이 존재<했었>겠지. 그런데 그 사회가 어떻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페트로니우스?」 페트로니우스가 침묵을 지켰다. 「우리가 전에 들어본 적도 없는, 네가 존재한다고 말한 그런 가부장제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그녀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가부장제가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니? 왜 그 존재를 증명하는 분명한 증거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지? 응?」 페트로니우스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갈피를 못잡았다. 「아니다, 페트로니우스. 너도 알겠지만…… 맨움은 생명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단다. 그들은 자손과 육체적 연결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죽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단다. 맨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땅의 생명이 죽어 없어질거야. 만일 맨움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만일 맨움이 제지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교화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은 소멸할 거다……」 루스 브램은 이 마지막 말로 논쟁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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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희한한……' 코웃음을 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게 다행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니다, 페트로니우스. 너도 알겠지만…… 여성(움 Wom)은 생명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단다. 그들은 자손과 육체적 연결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죽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단다. 여성(움 Wom)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땅의 생명이 죽어 없어질거야. 만일 여성(움 Wom)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만일 여성이 제지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교화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은 소멸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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