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現代文學』 2013년 11월호에서 읽었습니다.
단편소설「홋카이도의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에는 『연인』도 있지만 『히로시마 내 사랑』이 생각났습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에서 한 남성을 만나는 프랑스 여인의 슬픈, 가슴시린 사랑 이야기. 원자폭탄이 떨어져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스러져 간 아픔을 잊을 수 없게 한 작품.
우리에게는 그런 아픔이 없었는가, 새삼스럽게 그걸 상기하게 하고 싶은 『히로시마 내 사랑』. 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는가, 그것도 좀 함께 생각해보자고 하고 싶은 『히로시마 내 사랑』.
홋카이도의 연인
아무래도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죽을 것만 같다. 그렇다고 내가 일생일대의 작품 한 점을 남기겠다는 결심으로 살아온 화가는 아니다. 캔버스 전체에 처음 칠했던 건 어둠과 같은 검정색 물감이었다. 그다음에 나는 붓 끝에 흰색 물감을 묻혀서 거기에 도장을 찍듯 점을 찍었다. 점, 또 흰 점, 그리고 자꾸 반복되는 그 흰색 점들이 새까만 캔버스 위에 눈처럼 쌓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둠의 밀도를 쫓아가는 그 무수한 눈송이들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나는 다른 것을 그려 넣기 위해 깨끗하게 붓을 씻었다. 그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기침이 터져 나왔는데, 붓을 들고 있는 동안에 참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다 쏟아졌다. 내 귀에 기침 소리는 자지르지게 짖는 개 소리같이 들렸고, 그것과 비슷하게 짖었던 홋카이도의 개 한 마리를 옆구리에 끼고 사는 것 같았다.
목구멍에서 이렇게 다시 핏물 섞인 가래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겨울부터인데, 내가 도망치듯 떠나왔던 그 섬을 다시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말렸다. 그럴 만도 했다. 수 해 전에 '내란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끌려가서 내가 넉 달을 버티었던 그 추운 땅 홋카이도가 남긴 것은 고통과 악몽과 병뿐이었다.
거기로 끌려가기 직전까지, 나는 밤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동네 사람들과 즐겁게 모였다. 그리고 소리 죽여 '다른 말'을 읽고 썼다. 그 말은 아버지처럼 단순했지만 명확했다. 다른 말이 아니라 '우리말'이라고 아버지가 강조하지 않아도 그 말이 주는 기쁨과 감동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쓰고 있었던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지경이 바로 어떤 사람들에겐 내란內亂이 되었다. 그래서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던 우리 내란 죄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딘가로 끌려가야 했다.
연락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닿았던 홋카이도의 겨울은 모든 것을 얼렸다. 얼지 않는 것은 내가 일했던 슈마리나이 호수뿐인 것 같았다. 거의 날마다 눈을 맞았고 거대한 물가에서 삽질을 했다. 혼자가 아니라 수백 명이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가끔 얼굴이 닿을 만큼 그들과 마주해서 일할 때가 있었는데, 저마다 똑같이 죽은 양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들처럼 배고픔과 추위에 질려 있는 눈빛들도 똑같았다. 눈이 호숫가에 하반신이 다 묻히도록 내렸고 쌓였지만, 시퍼런 알몸의 호수는 가끔 몸을 출렁이면서 눈을 더, 더 부추겼다. 덕분에 일주일에 한 사람꼴로 노동을 그만뒀는데, 눈밭에 삽을 꽂고 선 자세로 잠이 드는 것 같았다.
흔들어 깨울 수 없는 깊은 잠으로 굳어진 사람은 망설임 없이 호수에 던져졌다. 혹시 그들 중에 얼음 같은 몸이 풀리거나 잠이 깨서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호숫가를 서성였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삽자루에 손이 쩍쩍 달라붙도록 모든 것이 얼어붙어도 호수물이 얼지 않는 까닭이란, 던져진 그들의 더운 영혼 때문일지 모른다.
아직 눈밭에 꽂혀 있지만 사람 없는 도구 앞에 서서, 나는 내 영혼이 몸부림치는 것을 느꼈다.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 자신이 부리던 삽을 호숫가에 꽂고 모자를 벗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모자를 벗기 시작했고 눈밭에 수백 개의 삽이 비석처럼 섰다. 그때 슈마리나이는 거대한 묘지 같았다. 노동을 감시하던 자들이 욕설을 퍼부었고, 제일 먼저 삽질을 멈췄던 사람에게 발길질이 쏟아졌다.
나는 그곳으로부터 기적처럼 탈출하여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폐의 일부가 썩어 있다는 것과 한쪽 발목이 얼어붙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까무러친 동안 그것들은 신속하게 잘려나갔지만 덕분에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수술 이후에 나는 모국어를 지켜낸 지사 혹은 용사로 분류되었고 노랗게 번쩍이는 별 모양의 훈장을 달게 되었다. 다른 말이 아니라 우리말로 큰사전을 만들고 있었던 아버지는, 내가 호숫가에서 삽질을 하는 동안 이미 고문실에서 사앙했다는 통보가 그의 이름이 새겨진 별과 함께 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빛나는 별을 보게 되다니. 나는 땅에 떨어진 그 별을 주워 들어 품에 안고 오열했다. 나는 새 이름 철수에다가 선생님이 붙여져서 철수 선생님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별을 찍어내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요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홋카이도를 다시 한 번 그것도 잠시만 다녀오겠다는 나를, 간호사들이 줄기차게 막아섰다. 철수 님, 아직 선생님께 홋카이도 여행은 무리입니다. 누구에게는 눈이 많아서 추운 땅이죠. 철수 선생님껜 고통스러운 기억이 많아서 더욱 추운 땅일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갈 수 있었고 가야 하는 이유도 많았다. 우선 나와 전혀 상관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겪어낼 수밖에 없었던 세계의 전쟁이 진즉 끝났다. 그리고 헐다 못해 찢어져서 피고름이 나던 내 항문에 뭉툭하게 새살이 차올랐고, 얼어버려서 끊어낼 수밖에 없었던 내 발목의 절단면도 이젠 빙판처럼 반들반들해졌다. 그래서 나는 목발을 짚고나마 일어섰고, 개가 짖듯 거푸 기침을 하면서도 날마다 요양원의 넓은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외상은 회복되었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죽을 것만 같다. 그것이 내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기침은 참을 수 있어도 나는 아직 캔버스에 어둠과 눈 이외에 다른 것을 그려 넣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깨끗하게 붓을 씻어도, 그리고 싶은 사람과 개를 그려 넣을 수가 없다. 그것들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짐승, 그러니까 카이와 아이누 그리고 그들의 개다. 나로 하여금 고향을 그리듯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저 얼어붙은 섬의 따뜻한 생명들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요양원의 허가 없이 혼자서 홋카이도를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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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라 1974년 부산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및 중앙대 대학원 문창과 석사. 1997년 『현대문학』 등단. 소설집 『내가 아는 당신』.
책이 그리울 때 신문 연재소설을 오려 붙여 한 권의 소설을 만들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 '정성'이라면 이까짓 단편소설 한 편쯤이야 하루저녁에 다 옮겨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옮겨 쓸 필요도 없이 당장 사진을 찍거나 복사해서 실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만큼 옮겨 써 본 것은, 이 소설을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 소설에 대한 도리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화자(話者)가 찾아간 곳은 홋카이도, "저 얼어붙은 섬의 따뜻한 생명들"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소설이 더 나오면 좋겠다,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을 쓰면 좋겠습니다.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원자폭탄 맞은 이야기, 조선에서 돌아갈 때 고생한 이야기(『요코 이야기』), 우리는 아시아를 개척해 준 빛나는 공적을 가진 나라(야스쿠니 신사 옆 전쟁기념관)라는 걸 앞세우면, 정말 우리는 할 말을 잃고 가슴을 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가슴이 따뜻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얼어붙은 섬의 따뜻한 생명들"!
그래서 소설은 이렇게 끝납니다. 전쟁 때문에 고통 받은, 아니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한 카이와 아이누, 그리고 아이누의 곁을 지켜준 개의 사랑 이야기.
…… 이것은 그림이 아니라 침묵이다. 아니 침묵이 꾸는 꿈이다. 나는 여전히 씻은 붓을 들고 기침을 참으며 앉아 있다. 내가 이제 숨조차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까닭은 개가 죽어버렸는데 다시 기침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내가 왜 검정색 바탕과 흰색 점 외엔 아무것도 캔버스에 그려 넣을 수 없는지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 나면 새벽하늘에 별을 그려 넣을 작정이다. 그다음엔 캔버스에 악착같이 찍었던 흰 점들을 그만 지우고, 눈이 완전히 녹은 슈마리나이를 그리고 싶다. 내가 호숫가에 다른 말로 오만 가지 색깔의 꽃을 피운다 해도 흰색 물감은 다시 또 필요할지 모른다. 남자와 여자와 짐승의 유골들이 드러나는 대로 눈보다 흰빛으로 진하게 칠해줘야 하니까.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호수가 깊은 숨으로 출렁인다. 어떤 목숨보다 지긋지긋하고 질긴 것이 있다고 속살거리듯, 호숫가에 다시 눈이 내린다. ●
이보라 소설가가 자신의 블로그 <이보라의 아포리즘적 글쓰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어주었습니다.
정말인지 가서 확인해 보기 ☞ http://sophytory.net/22015494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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