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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신임교감 A 선생님께

by 답설재 2013. 12. 5.

 

A 선생님!

교감이 되신 지 4개월째군요.

실감이 나는지 물어야 할까요, 자리가 잡혔는지 물어야 할까요? 꿈에라도 "자신감이 붙었다"고 대답하실 리는 없을 분이어서 다행입니다. 예전에 교장이 되었다면서 일부러 제게 찾아와서 "이제 전 공부와 연구를 다 했습니다!" 하던, 정신 나간 인간도 봤으니까요.

 

 

 

 

교감선생님에 대한 그 학교 교장, 교사, 학부모들의 기대는 '특히(현실적으로)' 어떤 것으로 드러났습니까?

흔히 이와 같은 일들을 모두 다 잘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중의 한두 가지 특징을 마음에 두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아쉽더라도 한 가지, 그게 어려우면 두 가지만 골라 보십시오.

 

- 학교 교육과정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 전문성은 합리적(논리적)인 것인가? 그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 역량을 가지고 있는가?

- 수업에 전문성이 있어 배울점이 있는가?

- 아이들을 사랑하고 잘 보살펴 주는가?

- 공문서를 능숙하게 잘 관리하고 처리하는가?

- 교장, 교사, 행정직, 학부모들과 원만하게 지내는가? 사람이 좋아서 까다롭지 않은가? 융통성이 있고 순조로운가?

- 교장에게 고분고분한가?

 

또 있겠지요, 얼마든지!

그러나 한국의 학교에서 교감으로 살아가는 데는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령 피아노를 잘 치는가? 우스개를 잘하는가? 술을 잘 마시는가? 노래방 가는 일에 책임을 지는가? 기사(예전에 '소사'라고 불리던 분들인데 지금은 '주무관'인가요?) 등 지원 인력과 친하게 지내는가? …… 그런 것들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꼭 그걸 물어야 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식이라면 위에서 별도로 열거한 것들 중에는 오히려 거의 무용(無用)한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학교 교육과정! 저의 경우 자격연수 때 장학지도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이런 건 감사에 걸린다며 아주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강사까지 봤으니까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교육부에서 오랫동안 교육과정을 관리하고 교과서를 만들다가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교감이 되어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교육부 일을 하던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겠지만 정작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고,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게 좀 싱겁게 느껴지기도 했고, 예전에 교사 시절에 늘 하던 일들이어서 정겹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복수 교감'이었는데, 교육부에서 나왔다고 제가 '수석'이고 함께 발령받았지만 저보다 5년이나 선배인 여성 교감이 '차석'이 되었습니다. 우스운 일은, 그분이 보기에 제가 하는 일들이 어설프고 서툴렀던지 '사사건건' 가르치려 들었고, 심지어 교사들의 주간교육계획을 읽지도 않고 도장만 쿡쿡 찍어대는 걸 바라보더니 ―한 학년이 열 하고도 몇 학급씩 더 있어서 도장 찍는 일만도 벅찼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교장에게 일러바치겠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분이 '나쁜 분'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정상'이었고 아무래도 제가 '비정상'이었습니다. 제가 교육부에서 교육과정을 정하고 교과서 내용을 정하는 일을 한 전문가라 하더라도, 당시는 모든 학교에서 교사들이 작성해 내는 그 주간계획에 교감이 뭐라고 몇 마디 주서(朱書)를 해줄 때였고, 그분은 교사 시절에 오랫동안 교무부장, 연구부장 같은 걸 맡은 경험이 있어 그런 일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저는 아주 우스운 존재가 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각설(却說)하고, 저는 그때 단 한 가지 일에는 철저했습니다.

좀 일찍 출근해서 교문을 쳐다보며 교장선생님을 기다리다가 교장실로 따라들어가서 말씀을 듣는 일이었습니다. 아! 그러기 전에 교장선생님의 실내화를 찾아드리고 가능하면 그분의 구두를 얼른 신발장에 넣어드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제가 아주 우스운 사람 같이 보이겠지만, 그건 아닙니다. 저는 아첨하는 일에는 젬병이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럴 대상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좀 뭣한 얘기지만 교사시절에는 걸핏하면 교장에게 대어 들었고, 복잡하고 어려운 ―가령, 시범수업, 연구학교 운영 보고서 작성, 교장실 교무실 복도 같은 곳에 뭘 잡다하게 그려 붙이고 화단에 꽃이나 잔디를 심는 학교 환경구성, 학교 건물 지붕에 제 키보다 더 큰 글자로 "창의적인 한국인 육성" 같은 걸 써붙이는 일 등등― 그런 일들은 도맡아 하면서도 근평(근무성적)은 허구한 날 "미(美)"가 고작이어서 일찍이 연구보고서 전국 1등급 같은 거창한 실적을 거두었는데도 교육부장관 표창은 받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 때문에 또 그 교장과 대판 시비를 몇 번이나 했고, 얼마쯤 지난 뒤 뭘 알고 쓰는지는 몰라도 그 교장 자신이 멋스러운 서체로 쓴 족자까지 선물했지만, 그 내용을 해석해 보나 마나 "서릿발 같은 너의 이성"이라든지 "아이들 같은 너의 가슴"이라든지 했을 리는 없고 분명히 "우선 인간이 돼라!" 아니면 "고분고분 높은 사람 말 듣고 원만하게 살아라!" 뭐 분명히 그런 뜻일 것이어서, 그렇다면 굳이 그런 인간이 되거나 미안하지만 결코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그 족자를 당장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일도 있었습니다.

 

하잘 것도 없는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어처구니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교감이 되어 그렇게 지내다보니까 교장선생님께서 제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제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수긍하고 심지어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그즈음, 아마 제가 해야 할 일과 차석 교감선생님께서 하실 일을 제 의견에 따라 바꾼 기억도 있고, 말썽 많은('학교를 괴롭히는'? 글쎄요, '학교에 불만이 많은'으로 표현해야 하겠지요?) 학부모들을 만나는 일을 제가 좀 열심히 한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렇게 하여 제가 생활지도나 대외문제 해결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라 여러 선생님들께서 자연스럽게 다가와 학습지도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해 가을, 어떤 젊은 선생님들은 교직 단체 활동에 필요하다며 저녁만 되면 "쿵! 쾅! 쿵! 쾅!" 국악기 연주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때마다 짜장면이라도 함께 먹고 하라고 그랬더니 나중에는 깊이 있는 대화까지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차석 교감선생님(사실은 대선배님)과도 차츰 잘 지냈습니다. 제가 남자 선생님들과 밤 늦게까지 술도 마셨을 뿐만 아니라, 어느 날 오후 그 교감선생님께서 즐겨 들으시는 KBS FM 방송에서 마침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9번이 들려서 무심코 "9번이네?" 하고 중얼거렸더니, 나중에 그 곡 소개를 듣고 확인하시더니 '별안간' '당장' 저를 좋아하시던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신기한 일도 기억납니다.

 

 

 

 

저는 교감 생활을 단 6개월만 한 것에 대해 참으로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감'이라는 직책이 정말로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좀 오래 할 수 있었다면……

그러면 선생님들이나 누가 들여다보며 "교감선생님, 뭘 그리 열심히 하세요?" 하면, "아니요, 교감이라고 괜히 폼나게 보이려고 이러고 있었던 거죠. 사실은 누가 좀 오기를 기다렸어요." 하고 대답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교감은 한자로는 '校監'이라고 쓰니까 그 뜻이 '별로'입니다. 영어로는 어떤가 싶었는데 "a head teacher; an assistant principal; a vice-schoolmaster; a principal[director] in charge"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시 딱 꼬집어서 뭐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校監'과 함께 그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단어들 같습니다.

교감은 교장 대신에, 혹은 교장을 보좌하여 교사들에게 '떵떵거리는 자리' '감독하는 자리'라면 한심해서 뭐락고 말하기도 귀찮고 싫습니다. 며칠 전에도 그런 교감이 있는 학교의 한 선생님으로부터 기나긴 하소연을 쓴 편지를 받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나오면 되겠다고 생각되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칫하면 그런 교감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감선생님은 이미 다 아시는 거지만, 학생들이 교육부장관을 위해 있습니까, 교육부장관이 학생들을 위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가정하면, 학생들은 교사를 위해, 교사는 교감, 교장을 위해, 교장들은 교육장이나 교육감, 장관을 위해 있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답은 아주 뻔한 건데도 어떤 행정가들은 "여러분이 내 생각을 해준다면, 나를 도와주고 싶다면, 학생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일갈하는 걸 봤습니다. 아, 정말…………

 

 

 

 

우선 잘 지내셔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먹은 일을 펼쳐볼 수가 있게 되니까요. 거기에서 실패하면 얼굴을 내밀 수도 없게 되니까요. 

그러므로 딱 한 가지만 부탁하라면 부디 당분간 "그건 아닙니다."라는 대답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하시면 교장이나 교사들이나 "우리 교감은 참 훌륭하다"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세상 이치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감선생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는데 그걸 왜 하지 않겠습니까? 교감선생님께서 지금까지 그려온 뜻을 펼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는 않겠지만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어쩌면 교사 시절보다 더 큰 마음으로 인내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교감선생님은, 멋진, 대한민국의 멋진 교감, 아름다운 교감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교감선생님 생각이나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해서 교감선생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 선생님들이 교감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늘 쓴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그 사람의 눈빛만 봐도 다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몸은 바쁘더라도 마음은 여유롭게 가지시고, 몸은 바쁘더라도 누가 물으면 언제나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셔서 사람들이 교감선생님을 찾아가고 싶게 하십시오.

 

행운을 빕니다. 자꾸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이 심정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새 출발에 필요한 노력과 지혜는 다 갖추었으므로 다만 행운이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그 행운은 교감선생님께서 만드신다는 것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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