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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내가 처음으로 그린 지도

by 답설재 2013. 5. 13.

 

 

 

 

 

내가 처음으로 그린 지도

 

 

 

 

 

 

 

 

 

 

 

 Ⅰ

 

 

  이 지도가 ── 이것도 지도라면, 내가 처음으로 그린 지도입니다. 그때까지는 아이들 교과서에도 어른들이 보는 일반지도를 넣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정교한 그런 지도로는 어린 아이들이 제대로 학습할 수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직접 그려보자'고 한 것입니다.

 

  제도사들처럼 제도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그린 것이 아닙니다. 요즘은 모두 컴퓨터를 써서 작업하지만, 그때는 제도기에 트레싱 페이퍼를 얹어놓고 그렸고, 그 제도기 안에는 형광등을 켜서 트레싱 페이퍼가 환하게 비쳤기 때문에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교한 선으로 작업을 하는 것으로 주로 독일제 로터링펜에 먹물을 넣어서 흔들어가며 선을 그렸습니다.

 

  나에게는 그 제도기조차 있을 리 없어서 방바닥에 트레싱 페이퍼를 펴놓고 그렸습니다. 선을 그린 페이퍼 위에 새 페이퍼를 자꾸 얹어가며 한 치의 착오도 없도록 작업해 나갔습니다. 그 트레싱 페이퍼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기구가 없었으므로 네 귀퉁이를 무거운 책이나 돌덩이로 눌러 놓고 그렸습니다.

 

  작업을 하는 중에는 그 종이를 움직이면 안 됩니다. 출근을 할 때나 다른 볼일을 볼 때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아내는 그런 걸 건드리거나 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무모한 작업을 지켜보는 아내는, 내가 나중에 우리나라, 우리 교육에 무슨 큰 공헌을 하는 아주 특출한 인물로 성장할 줄 알았을까요? 허구한 날, 밤을 세워서, 교사 치고는 희한한 작업을 하고 앉아 있으니까…….

  지금 보면 미흡한 점이 수두룩하지만, 그래도 저게 어디 한두 시간에 끝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Ⅱ

 

 

  보십시오. 지난번에 '강우철 선생에 관한 추억'(2013.5.5)에서 이야기한 그 지역단원이 들어 있는 교과서 표지입니다. 좀 건방진 말일지 모르지만, 저기 저 '지역단원'에 보이는 분들은 모두 제 덕을 얼마쯤은 본 분들인데, 그걸 기억해 주실는지……

 

  '그까짓 게 무슨 영광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 세상에 교과서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생각이니까 교과서에 이름이 오르는 것보다 더 영광스런 것도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Ⅲ

 

 

  그때 만든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사회 교과서는, 차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저렇게 1단원은 '우리 시·도의 생활'이고, 2, 3, 4단원은 전국 공통 단원이었습니다.

  그 1단원을 우리는 "지역단원"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그 이전에는 전국적으로 똑같은 내용을 배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자연환경은 경기도, 행정구역은 충청남도, 산업은 전라북도, 관광은 강원도와 제주도에 관한 내용을 실어 놓았고, 교과서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전국적으로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가르치고 배웠으며, 심지어 월말고사, 일제고사, 학력평가 출제도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나는 그걸 '웃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회과 일제고사 문제를 출제하게 되었을 때, 대구에 관한 자연환경, 행정구역, 산업, 관광, 주민들의 노력 같은 문제를 내었더니, 그게 교육청에 알려지고, 교육청 담당 장학사가 난처해하더니 "이치에 맞다"는 판단을 해주는 '행운'으로 일약 유명인사가 된 적이 있습니다.

  나 참……

 

 

 Ⅳ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는 어떻게 나옵니까?

  저 교과서는 제5차 교육과정에 따른 초판 교과서 수정본이고, 제6차 교육과정 때는 내가 담당 편수관이 되어 아예 각 시·도별로 4학년 1학기는 학기 내내 그 시·도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 '사회' 교과서는 전국 단일본, '사회과탐구'라는 부교재는 각 시·도별로 편찬했습니다.

 

  그 일을 당시 교육부 편수국장은 물론 거의 모두 반대했습니다. 각 지역에 교과서 집필 인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그렇게 하다가 말썽이 생기면 귀찮아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김용만 편수관(장학관)과 나 두 사람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해본 일이니까 각 시·도에서 선발될 교원들을 가르치면 될 것으로 믿었고, 김용만 장학관은 나의 노력과 아이디어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게 가능하도록 몇 년 간 고군분투했습니다. 그 '피눈물'은 언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긴 합니다.

 

  그 지역교과서 '사회과탐구'가 제7차 교육과정기에는 시·도별 인정도서로 바뀌어 지역교과서 편찬의 꽃, 지역교과서 연구·개발 인력 양성의 황금기를 이루었습니다.

  그 지역교과서가 없어졌다니, 세상은, 교육은 변하긴 변하는 것 같습니다.

 

 

 

 

 

 

 

 

 

 

 Ⅴ

 

 

  다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런 작업을 한 '흔적'을 더러 갖고 있었는데,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고 그게 뭐 중요할까 싶어서 이리저리 다 흩어지는 것을 방치했습니다.

  그런데도 저 교과서는 어디에 숨어 있어서 이렇게 들여다보게 된 것입니다.

 

  저 지도를 그린 후, 교육부의 사회과 교과서와 지도서 편찬 업무를 돕기 위해 3년간 파견 생활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사회 교과서에 지도를 그려 넣었는데, 다 '제 신명'으로 한 일이었고, 지루할 때마다 조금씩 술을 마셔서 자칫하면 술주정뱅이가 될 뻔했습니다.

  그 지도들을 그리느라고 그동안 모아놓은 양주 7병을 한 달 만에 다 마시고, "술은 어떻게 했느냐?"는 아내의 추궁에는 사람들이 와서 다 마셔버렸다고 했습니다.

 

  저런 작업을 할 때, 전문가가 아니면 ── 돈을 '왕창' 버는 일이 아니면, 맨 정신으로는 할 수가 없으니 술을 조금씩 마셔가며 하는 것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