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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교과서의 변화는 왜 더딜까?

by 답설재 2013. 3. 22.

 

 

 

 

 

교과서의 변화는 왜 더딜까?

 

 

 

 

 

 

 

 

 

 

 

 

 

<교과서 이야기 ①>

 

 

 

교과서의 변화는 왜 더딜까?

 

 

 

  ◇ 교과서 같은 사람의 실체

 

  어느 초등학생이 ‘마음에 드는 선생님’(이렇게 표현하면 ‘비교과서적’이겠지만……) 한 분을 취재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신문 어린이기자단 카페에서 옮김).

 

 

  그 선생님은 내가 만난 선생님들 중에 가장 현실적인 사람이다. 그것이 내가 선생님을 취재한 이유다. 보통 선생님들은 책에 나오는 사람처럼 올바른 것만 추구하고, 무조건 해야 하고 지켜야 한다고 지시한다. 하지만 이 선생님은 다르다. 가끔 엉뚱하게 돈을 조금 들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화를 보는 방법을 설명하는 한편, 번개가 치는 날에는 선생님 친구가 토르라고 하면서 토르가 지금 악당들을 물리치고 있다고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1~2학년 애들은 속는다. ㅋㅋ) 그리고 선생님 차는 낮에는 평범한 차인데 밤이 되면 날개가 생겨서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신다. 이번에는 재미있는 게임 이야기를 좔~좔~좔 쏟아내셨다. 나는 이런 것이 너무 좋다. 무엇을 만들 때는 음악을 들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다.

  …(중략)…

 

 

 

  짤막한 이 글로도 우리 교육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직접적으로 교과서에 관련되는 부분만 가려보면 “보통 선생님들은 책에 나오는 사람처럼 올바른 것만 추구하고 무조건 해야 하고 지켜야 한다고 지시한다”고 표현한 부분이다. 바꾸어 말하면 교과서는 올바른 것만 추구하고,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고, 지켜야 한다고 지시하는 것이란다. “당연하잖아?” 한다면 결코 이 아이가 좋아할 대상은 아니다.

  “교과서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이중성을 지닌다. 아주 대단한 칭찬이거나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을 만큼 앞뒤가 꽉 막혀 상대하기가 싫은, 그런 사람이라는 극도의 비난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결코 어중간하다는 표현일 경우는 없다. 말하자면 “저 사람은 교과서 같아서 분명하지가 않아!”라는 표현은 성립될 수가 없다. 교과서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극명한 이중성의 배경이 된 것일까? 따지고 보면 간단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음악가들”, “교과서에 나오는 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전시회”, “우리나라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교과서적인 투수”, “배낭여행의 교과서”, “거시경제에 관한 한 교과서적 이야기”…… 라고 표현할 때의 교과서는 그야말로 전문성, 정확성, 신뢰도 같은 것의 전범(典範)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런 ‘교과서’가 태도나 자세에 관한 표현으로 쓰이게 되면 돌연 형편없는 수준의 비유로 전락해 버린다. “에이 답답한 사람! 늘 교과서 같은 말만 한다니까?”

  덧붙이고 싶은 사례가 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이다. 한때 이 이야기가 없이는 교과서가 나올 수 없을 정도였다. 모름지기 흥부 같은 사람이 되어야 ‘인간다운 인간’이며, 모든 국민이 마땅히 흥부로서 살아가야 이 세상이 함께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던 것이 “어? 어?” 하는 사이에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려면 때로는 놀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게 되었고(사실은 그런 표현조차 불필요한 이 세상!), ‘어떻게 저런 발상을 했지?’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나보다 훨씬 똑똑해 보이고, 요즘 초등학생들이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읽기나 하는지조차 잘 모르게 되고 말았다. 물론 ‘흥부와 놀부’를 그만 읽혀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교과서는, 적어도 저 글을 쓴 초등학교 아이에게 마땅히 확실한 대답은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저 아이는 이렇게 물었다.

 

  “그 선생님은 어느 선생님보다도 자유분방한 선생님인 것 같다. 내가 사람다운 선생님을 이제야 만나보는 것 같다. 선생님이 앞으로도 이렇게 현실적이셨으면 좋겠다. 나는 그 선생님 시간에 보다 자유로워진다. 다음 주에 나는 또 무슨 농담을 듣게 될까???”

 

 

  ◇ 이름부터 답답한 교과서들

 

 

  아이들은 교과서 표지에서부터 따분해한다. 그걸 가지고 장난을 하는 것만 봐도 안다. 교과서의 이름들은 거의 교육과정에 제시되는 교과와 과목의 이름을 따른다. 국어, 국어활동, 사회, 역사, 도덕,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수학, 수학익힘책, 과학, 실험·관찰, 체육, 음악, 미술, 실과, 기술·가정, 영어, 한문, 정보, 환경과 녹색성장, 생활 독일어(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아랍어, 베트남어), 보건, 진로와 직업, 화법과 작문, 독서와 문법, 문학, 고전, 한국지리, 세계지리,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 경제, 법과 정치, 사회·문화,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지리부도, 역사부도, 기초수학, 고급수학, 확률과 통계, 미적분, 기하와 벡터, 기초영어, 실용영어, 영어회화, 실용영어회화, 실용영어 독해와 작문, ……

  그만해도 충분할 것이다. 행정 담당자의 설명이 들릴 것 같다. “고등학교의 경우 서책형 인정도서로 지정된 과목만 해도 451종이나 되는데, 교과서 이름을 교육과정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구분하겠나? 교과서 이름을 제멋대로 붙인다면 그 혼란을 무슨 수로 감당하겠나!” 그건 안다. 그렇지만, 그러니까 그게 아이들을 얼마나 숨 막히게 하겠는가. 국어, 국어활동, 사회, 역사, 도덕,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수학, 수학익힘책, 과학, 실험·관찰, …… 디지털논리회로, 측량, 역학, 토목설계, 토목재료시공, 수리·토질, 지적전산, 지적실무, 공간정보, 건축구조, 건축계획, 건축목공, 건축구조체시공, 건축마감시공, ……

  구태여 구분을 위한 것이라면 그건 행정 혹은 이른바 공급자 위주의 관점이다. 아니, 우리는 은연중에 교과서 이름은 바꾸면 큰일 나는 것, 혹은 그건 아예 손댈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은 사례가 있다. 6차 교육과정 때는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사회과 부교재(사회과탐구)를 처음으로 지역별 국정 교과서로 개발하고 그 지역 교과서 이름을 자유롭게 붙였다. 서울의 생활, 살기 좋은 강원도, 우리 경상북도, 아름다운 제주도, …… 그렇게 해도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작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7차 교육과정에서는 자연스럽게 시·도 자체 인정도서로 바뀌는 발전을 이루었다.

  최근의 사례도 있다. 초등학교 1·2학년 통합교과 교육과정의 교과명(‘바른생활’, ‘슬기로운생활’, ‘즐거운생활’) 그대로 이름 붙여오던 그 교과서들이, 이번에는 ‘학교’(‘나’) ‘봄’ ‘가족’ ‘여름’ ‘이웃’ ‘가을’ ‘우리나라’ ‘겨울’ 등 여덟 가지로 바뀌었다. 이제 와서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바른생활’, ‘슬기로운생활’, ‘즐거운생활’이 좀 촌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을 하라고 책 이름에서부터 강요한 것 같아 늦었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선생님들끼리(심지어 학자들도) 회의를 하며 그 교과 혹은 교과서 이름을 ‘바생’ ‘슬생’ ‘즐생’ 혹은 ‘바’ ‘슬’ ‘즐’이라고 하여 공연히 어색해하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이유

 

 

  교과서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강조되어 왔다. 지식 전달에 치우쳐 권위 있는 내용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데 열중하는, 말하자면 지식 요약형, 개념 압축형, 강의 요강형을 탈피하여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을 길러주는 교과서, 지적 활동을 자극하고 촉구하는 교과서, 새로운 지식을 발견·창조해 내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과서, 말하자면 교육과정 중심 교육에 필요한 학습자료로서의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주장의 내용이었다.

  30여 년 전부터 교과서를 지나치게 경전화(經典化)하는 ‘한국적 현실’을 반성해야 한다고도 했고, 심지어 강우철(1979)은 “단연코 교과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미신부터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교과서의 이름과 교과명의 일치

∙ 1교과 1교과서(책)주의

∙ 국판 이외의 크기에 대한 기피증(4‧6판, 크라운판, 4‧6배판 등의 구사)

∙ 색도가 많을수록 좋다는 미신

∙ 자습서와 교과서를 애써 구분하려는 태도

∙ 교과서는 내용을 간추린 골자이기 때문에 매력이 없고 재미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는 책임 회피

∙ 일본식 교과서 모형에 대한 공감

∙ 미국식 교과서 모형에 대한 열등의식 내지는 자포자기

∙ 교과서는 학생 전원이 고루 구비해야만 한다는 생각

∙ 교과서는 학교와 집 사이를 반드시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고정관념

∙ 배우기보다는 가르치기에 더 편리하게 만들려는 의도

∙ 교과서에 대한 지나친 신성시 내지는 권위 부여

∙ 교과서의 내용은 시험에 낼 주요 사실의 조직이라는 관점

∙ 교과마다 반드시 교과서가 있어야 편리하다는 생각

∙ 미술, 음악 등은 자료와 이론을 따로 편찬하기 어렵다는 단정

∙ 도덕 교과서는 사례집, 예화집으로 구성하면 교과서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생각

 

 

  미신은 타파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벌써 30여 년 전의 저 ‘미신’ 목록 중에서 우리가 타파해버린 사항은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주장을 한 학자는, 국정 교과서에 대한 애착을 탈피하지 못하는 이유를 물으면서 희망하는 교과목은 검·인정 교과서와 국정 교과서를 경쟁적으로 동시에 개발하고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채택하게 하면 분명히 더 수준 높은 교과서가 나올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 지금 실제로 그 제도를 실시하는 나라가 있는 걸 보면 신기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우리 교과서는 왜 바뀌지 않는지, 왜 몇 십 년간 되풀이되는 주장이 잘 실현되지 않는지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로저 샨크(2001)는 이렇게 예측했다. “우리가 아직 교사와 교실과 교과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50년 뒤에는 거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돌이켜보면서 우리가 교육 개념을 바꾸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왜 수능 성적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왜 답을 암기하는 것이 지능의 증거라고 생각했는지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곧 사라지게 될 교과서를 가지고 우리가 너무 소심하게 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좀 적극적으로 바꾸지 못하고 이렇게 깔짝깔짝하다가 언젠가 큰코다치지나 않을까 싶기도 하다. 로저 샨크도 교과서가 영 없어진다는 건 아니겠지만, 그날 우리는 어떤 힘으로 교과서를 바꾸게 될지 예측해보게 된다. 교육계의 힘으로? 지금 잘 되지 않는 걸 그땐 무슨 힘으로? 외부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어서? 그럼 그때 우리는 교과서를 만드는 일이 신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랑스럽지도 않고, 차라리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