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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강우철 선생에 관한 추억

by 답설재 2013. 5. 5.

 

 

 

 

1987년이었던가, 그 전이었는가…… 무슨 자전적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어슴푸레해도 그만이겠지요. 1990년 3월에 정본이 나온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사회과 교과서를 집필할 때였습니다.

 

그 교과서 1단원 '우리 시·도의 생활'은, 서울은 '우리 서울의 생활', 대구는 '우리 대구의 생활', 제주도는 '우리 제주도의 생활'이었고, 그 단원을 우리는 '지역단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전에는 교과서에 가령 충청남도의 행정구역이 나오면 일제고사 시험문제에도 충청남도 행정구역에 대한 문제를 출제했고, 관광에 관한 문제라면 제주도나 강원도에 관한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나 같은 '위험인물'은 그곳 대구에 관한 문제를 출제해서 교육청을 난처하게 만들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초등학교 사회과 국정도서(1종도서) 개발은 '이화여자대학교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위원장 康宇哲)'에서 맡고 있었지만, 지역단원 연구진과 집필진, 삽화진은 해당 시·도에서 맡았습니다. 그건 당시로는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대구의 지역단원 집필자인 나는, 사실은 당시의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와 지도서 편찬 실무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광역시교육청에서는 지역단원의 연구나 집필, 삽화를 아예 나에게 일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교육부 편수관(김용만)이나 이화여자대학교 강우철 교수의 나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습니다. 이건 자부심이 아니고 사실이었으며, 그 당시의 일을 기억한다면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 지역단원 개발 과정에 대해서는 기록해 둘 만한 얘기가 많지만, 각 시·도별로 처음에 써 낸 원고는 원고라고 부를 수도 없는, 무슨 대학교 1학년생 리포터 같았다고만 해두면 될 것 같습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라고 했을 때 모두들 고개를 끄덕여 놓고는 어설프고 비논리적인 논문처럼 썼고, 가능한 한 짧은 문장이 좋다고 했는데도 열 줄 이상 숨 막히는 문장이 이어지기도 했으며, 그것조차 비비 꼬인 문장이 대부분이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분간도 되지 않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우철 교수나 김용만 편수관은 실망하지 않고 여러 차례 담당자들을 불러 모아 연수회를 개최하고 원고 검토를 해주었으며, 그때마다 나는 칭찬을 받는 '유일한' 존재였으므로 나의 그 자부심은 당연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려고 당시에 나온 교과서를 찾아보고 나 스스로 놀란 점은, 원고를 정성들여 쓴 것은 물론, 사진도 한 장 한 장 모두 내가 구했고, 심지어 지도까지 내가 그렸는데, 제도기도 없이 독일제 로터링펜과 트레이싱 페이퍼만 가지고 그걸 다 그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짓을 했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송주순 편집 담당자가 내가 가져간 트레이싱 페이퍼를 받아 반신반의하며 색 분해를 해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 일로 해서 "초등학교 교사가 손으로 지도를 그린다!"는 소문이 퍼졌으며, 이후 6차 교육과정기의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에는 내가 그린 지도가 많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 나는 교과서 만드는 일 이야기만 하면 자꾸 길어지고, 이번에는 이 이야기를 언제 다 할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강우철 교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방학에는, 한 달 내내 서울로 불러 올려서 일을 시키면서도 교육부 김용만 편수관이 "선생님, ○ 선생이 저렇게 애쓰는데 용돈 좀 주시죠" 하면, "응, 참!" 하고는 '멋진' 지갑에서 10만 원 짜리 '멋진' 수표 딱 한 장을 내어주던 강우철 교수님.

 

그렇지만 나는 괜찮았습니다. 5차 교육과정에 의한 사회과 교과서 전체 내용을 내가 직접 수정할 수 있었고, 지도서의 내용을 내 마음대로 편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보다 더 신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아, 또……

이제 정말 한강호텔에서의 강우철 선생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창 너머로 한강이 조용하게 흐르고, 가끔 물살을 가르며 보트가 달려가고, 건너편으로 강남 시가지가 보이는 멋진 풍경의 한강호텔…… 서울 사람들은 모두들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자동차 행렬은 밤낮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연수회가 시작되면, 그 호텔 세미나장에 각 시·도에서 모인 교장, 교감, 교사, 장학관, 장학사들이 줄을 맞추어 앉습니다. 그 안쪽에는 사회과 교과서에 전문성이 있는 교수들(예 : 인천교대 한면희 등)과 교원들(예 : 구연무, 박환이 교장 등), 다시 저 안쪽, 그러니까 맨 앞에는 강우철 교수와 김용만 편수관이 앉게 됩니다.

 

각 시·도 담당자가 자신들의 원고를 발표하면, 저 안쪽에서 기라성 같은 분들의 품평이 들려오고, 마지막으로 편수관이나 강우철 위원장의 한마디가 들려옵니다. 원고를 웬만큼 써서는 꾸지람을 면할 수 없었으므로 그 순간에는 그야말로 죽을맛, 죽을상이었고, 그 시간이 지나면 드디어 고삐를 늦추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늘 그 분위기가 좋았고, 은밀히 그 분위기를 즐겼습니다. 내게는 아무도 비난이나 비판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고, 누가 입을 열었다 하면 그건 칭찬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저 안쪽의 말씀'도 거의 언제나 "다른 시·도에서도 원고를 이렇게 써야 교과서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영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불문율'이 깨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강우철 교수가 그렇게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순 모두 귀를 기울였고 숨을 죽였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빨리 이야기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습니다.

 

"김 선생 원고는, 단어 하나하나 한 줄 한 줄 어느 페이지나 흠잡을 데가 없어. 아주 잘 다듬어서 교과서 문장답게 정교하게 기술되어 있지. 그러니까 뭔가 부족하다 싶어도 쉽사리 짚어낼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거야."

 

 

 

 

그건 사실입니다. 지금도 나는 문장을 다듬는 일이라면 웬만큼은 하는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윤문가(潤文家)'라는 직업이 있다면 그걸 한번 해보고 싶기도 합니다. 미래엔(주)의 전무, 사장, 고문을 거쳐 지금은 교학사 부사장으로 있는 이승구 선생도 내가 교과서 윤문하는 걸 지켜보고는 "대한민국 편수 역사에서 윤문으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칭찬을 해준 적도 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털어놓는 거지만, 나는 대학 때 현상문예 소설 부문에서 2년 연속 입상했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지만 시 부문에서도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른 적이 있었으므로, 문장론을 배우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소양을 쌓아보려고 노력한 경험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그 정도의 성과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나는, 교과서라면, 가령 인공위성이나 세계 100대 기업에 들어가는 그룹, 혹은 약 100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보다 더 소중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바꿀 의향이 전혀 없는 입장이어서, 교과서 문장 다듬기라면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서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고"를 얼마든지!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결국은 그 교과서 곳곳의 문장부호까지 다 암기할 수 있을 만큼! 그러나 집필자의 의도와 문장 구성은 그대로 살아 있게 고칠 수 있는! 끈질긴 노력을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니까 교사로서 그 일을 하는 것 역시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값진 것이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가슴속에 아로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내가 쓴 원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자부심과 자만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만 더 보태면 문장다듬기라면 누구하고라도 한번 맞짱을 떠보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분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말이야…… 김 선생 원고에는 말이야…… 아이들이 잘 보이질 않아."

 

 

 

 

"원고에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한 마디에 변했습니다. 아니, 겉으로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생각은 한없이 깊어졌습니다.

다른 사람 원고에는 아이들이 보입니까? 묻고 싶지는 않았고, 물을 필요도 없었고,

대학원에서 석사과정만 마치고 만 것이 한탄스러웠고,

잘난 체한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고……

내가 도대체 뭘 읽고 생각해 왔나, 어떻게 살아왔나……

교과서라는 건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앞으로는 무얼 읽고, 듣고, 생각하고, 말해야 하나……

저분은 도대체 얼마나 깊은 분인가……

 

 

 

 

어쨌든 그 말씀은 옳은 것 아닙니까? 교과서라면 그 문장 속에 초등학생이 보이든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보이든 보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걸 모르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친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아이들이 배울 교과서를 집필한다고 하겠습니까?

 

나는 '배운다는 것'에 대해 그분에게서 배웠습니다. 만약 박사과정을 이수한다면 그분으로부터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사학위가 부럽다고 해서 ──뒤늦게 전공을 바꾸어 엉뚱하게 역사교육을 더 공부할 수는 없으므로── 그건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아예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나서지도 않았지만 마음속에 그분의 그 말씀만은 깊이 깊이 간직하고 살아왔습니다. 그것을 '배움'으로 삼았습니다.

 

"문장 속에 아이들이 있어야 한다!"

어떤 아이들?

어떻게 살아가는 아이들?

어떻게 살아가야 할 아이들?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아이들?

나와 얼마나 달라야 하는 아이들?…………

 

문교부 역사 편수관을 딱 6개월 간 한 분이라는데, 이화여자대학교에 있으면서 S대학으로 옮기고 싶어 하니까 '역사교육'을 강의하지 않고 '역사'를 강의한다면 부르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그날, 그 대학 강당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고, 책도 나누어 주었는데, 자그마한 다섯 권 한 세트였습니다. 그 책 속에 그분이 지나온 날을 보여주는 사진이나 이력사항 같은 건 단 한 줄도 없어서, 말하자면 그 책들은 '쓰레기'가 아니어서 지금도 나는 그 책 다섯 권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달라져야 할 사회과 교육』

『역사는 왜 배우는가?』

『이웃 학문에서 본 한국사』

『분단국의 역사 교과서 비교』

『한국사 서술의 새로운 시각』

 

덧붙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분은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학자들 중에서 교과서의 '혁신'에 관한 생각을 가장 '혁신적으로' 이야기한 분입니다. 그분이 30여 년 전에 이야기한 것들을 우리는 지금 인식하거나 발견하고 아직도 그것을 실천할 수 없는 것에 아득함을 느낍니다. 이 블로그에는 그분이 이야기한 것을 인용한 부분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교과서를 단 한 번도 만들어보지 못한 주제에 아는 척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정년퇴임을 한 그분은, 교학사 양철우 사장의 요청(배려)으로 그 회사 편집실에 나가 '한국사 대사전' 원고를 집필했습니다. 나는 양철우 사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좀 있지만──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양 사장이 겁낼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분에 비해 게임거리도 아닌 존재여서 그분이 "웃기지 마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두어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강우철 선생에 대한 배려(요청)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배려(요청)의 배경이 영리적인 것이었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입니다.

 

강우철 선생은, 정년퇴임 후에 그리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저도 좀 아는 일이어서 하는 말이지만, 성품이 그러면── 대나무 같으면 ──오래 살기가 어렵습니다. 스스로 그 성품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덜렁덜렁 술 한 병을 사들고 더러 세배를 갔었는데, 그분이 그렇게 일찍 별세해서 그 짓을 몇 번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나면 다 '그만'입니다. 살아 있을 때 아주 용(龍)을 그려도 다 '그만'이고, 무덤을 거창하게 꾸며봤자 무슨 수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 세월이 그리 오래 흐른 것도 아닌데, 그분이 세상을 떠난 일이, 아니 그분이 이승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새 까마득한 일이어서 이제 나도 자꾸 몸이 불편해지게 되니까 새삼스레 더러 생각이 나고, 그러면서 그분이 괜히 그리워지는구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그분의 성함이 찍힌 브로슈어(『한국사 대사전』)를 보았습니다.

다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이 정년퇴임을 하고 교학사의 그 편집실 어느 방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며 지냈을까, 그걸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이건 눈물겨운 생각입니다. 삶이라는 것의 특성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그건, 그 '한국사 대사전'에 이미 저승에 간 분이지만 강우철 선생의 성함을 넣는 것이 책의 판매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저작권을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습니다, 강우철 선생의 이름이 들어 있는 책을, 그것도 요즘 교학사 사정이 그리 좋지도 않다는데 적지 않은 자금이 투입되었을 것이 분명한 전 10권짜리 사전을 내었다니, 양철우 사장이 '참 대단한 분이긴 하구나. 고마운 일이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우철(康宇哲)! …………

아, 강우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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