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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5․16군사정변

by 답설재 2013. 3. 3.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 청문회장에서 5·16의 성격에 대한 국회의원(민주당)들의 질문과 후보자들의 답변에 대해 우문우답(愚問愚答)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이 민망할 따름이라는 사설을 보았다.1

 

서남수 교육부장관 후보자는 "5·16이 군사정변이냐"고 묻자 "교과서에 기술된 것을 존중한다. 직답(直答)을 못하는 이유를 이해해달라"고 했고, 거듭되는 질문으로 30분간 정회까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청문회에서도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었다고 한다. 즉 황교안 법무부장관 후보자는 답변을 피하다가 "(교과서 내용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고 했고, 유정복 안정행정부장관 후보자는 서면으로 "답변하기 어렵다"고 했단다. 이들에 비해 정홍원 국무총리는 "교과서에 군사정변이라고 기록돼 있고 저도 찬성한다"고 분명히 밝힌 것으로 보도되었다.

 

 

 

5․16은 교과서에 기술될 경우 '5·16군사정변'으로 한다는 것이 교육부의 공식적인 결정이다.

이 용어 정리는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담당 : 신영범 연구관)의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1993년 9월에 9명의 역사학자들에게 이 연구를 위촉하여 1994년 11월에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이라는 이름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동안 연구위원회 주최 학술토론회 개최 ⇒ 국사편찬위원회 의견서 접수 ⇒ 연구위원회 보고서 접수 ⇒ 교육부 준거안 작성 ⇒ 심의위원회 심의 ⇒ 국사교과서편찬심의위원회 심의 ⇒ 국사편찬위원회 심의 ⇒ 준거안 확정의 절차를 거쳐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이 결정되었다.

 

이 연구는 ‘근·현대사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역사용어의 정리’ ‘역사학계의 새로운 연구성과를 교과서 내용에 반영’ ‘제6차 교육과정의 중·고등학교 교육과정 국사과 내용요소에 따른 서술방향 제시’를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준거안 작성의 기본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 그동안 축적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검토하여 정상으로 인정된 사항만을 교과서 내용에 반영한다.

◦ 우리 민족사의 주체적인 발전 과정을 중시하며, 문화 역량이 풍부하였음을 부각시켜 민족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한다.

◦ 세계사적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 특정 이데올로기나 역사관에 편향되지 않고 역사 교육적 관점에서 역사 용어를 정리하고 서술 방향을 제시한다.

 

 

 

이 일을 하던 1993~1994년 당시 교육부에는 편수국(編修局)이 있었고, 1996년 김영삼 정부 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 그 부서에 근무하는 편수관(編修官) 중에는 이른바 '날라리'(일없이 그저 노는 데에만 열심인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들이 많긴 했지만, 그 '날라리'들을 포함하여 우리 편수관들은 긍지 높은 전문직들이었다.

 

어쩌면 그 '날라리들'의 긍지가 전문직다운 전문직보다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편수관으로서는 별로 한 일도 없는 이들이 교육청으로 나가서는 높은 직위를 차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고,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편수관 직책의 허명(虛名)을 드날리고 있다. 그걸 보면 세상은 참 요지경 속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나는 나 혼자서라도 편수관으로서의 책무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근무했고, 선배들 중에는 얼굴만 봐도 그런 기상이 역력한 분들이 더러 있었다.

 

나중에 제7차 교육과정이 고시되고, 그 교육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현장의 비난이 소나기처럼 쏟아질 즈음 "교육과정을 만든 사람이 적용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나돌면서 학교 교감으로 나갔던 나를 다시 불러들였을 때 나는 겨우 교감 6개월만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중얼거리기만 했었다.

'교육과정을 만든 사람? 나는 제7차 교육과정을 만들 때 겨우 교육연구사였는데? 위로 수십 명의 연구관, 장학관, 과장, 국장이 즐비했는데?'

그렇게 다시 들어간 그 교육부에서 다시 고난과 영욕의 4년 6개월을 보냈을 때 내 정년은 겨우 5년 6개월만 남아 있었다.

 

다른 이야기가 길어졌다. 편수국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이 많고,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는 걸 보면 나도 '지겨운 인간'(버트런드 러셀), 고물, '털딱충'이 된 게 분명하다. 아마 어쭙잖은 인간이어서 회고록을 쓸 주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지만, 누가 정작 회고록을 써보라고 해도 쓰지는 못할 형편이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숨쉴 겨를이 없었으므로 아무런 메모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위원회에서는 국사 교과서 내용에 대한 준거안과 함께 당시 문제가 되어 오던 몇 가지 역사적 용어에 대해서도 새로 정리하였다.

이때, 5․16에 대해서는 ‘쿠테타’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전문적 학술서가 아닌 교과서에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수용하였다. ‘정변’이라는 용어는 쿠테타, 혁명 또는 불법적인 방법에 의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5․16군사정변’으로 표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5․16 이후 30년간의 역사는 전근대적인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을 강조하여 ‘5․16군사혁명’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다 지나간 날의 이야기다.

지나간 일이다.

 

 

 

그 연구에서 정리된 용어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4·19혁명

*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 : 통상 수교 거부

* 동학농민운동

* 일본식 성명 강요

* 8․15광복

* 대구 10·1폭동사건, 제주도 4·3사건

* 여수·순천 10·19사건

* 6·25전쟁

* 10·26사태 이후의 역사 용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사태 이후, ‘12·12사태’는 특정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실 위주 내용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하였고,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도 현행대로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하였다.

특히 ‘12·12사태’는 지금까지 사회과학적 관심에서의 논설과 정치학적 관점에서의 논문은 있으나, 역사학자에 의한 논고는 거의 없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유동적인 현대사(Current History) 관련 사건은 타당한 자료에 의한 연구결과에 따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이었다.

 

따라서 아직 학문적 연구가 미약하고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유동적인 현대사 관련 사건을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칠 경우 교육적 입장에서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12·12사태’는 역사학계의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교과서에서는 특정 용어 사용을 보류하면서 실제 상황을 문장으로 풀어 서술하도록 하였다.

                                                              ☞ blog.daum.net/blueletter01/7637230](blog.daum.net/blueletter01/7637230

 

그것도 다 당시의 이야기다.

 

 

 

관련 부처를 지휘할 장관들이니까 역사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이미 교과서에 게재되는 용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아마 용어를 그렇게 정리한 그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편수관으로서의 정서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이런 문제에 대한 질문과 답변은 전에도 자주 문제가 되어 왔지만, 사실은 장관으로서의 자질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기 때문에 '우문우답(愚問愚答)'이라는 논평이 나오는 것 아닐까 싶다.

 

사전을 봤더니 쿠데타는 "[정치]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력 등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정권(政權)을 빼앗으려고 일으키는 정변"이고, 정변은 "반란이나 혁명, 쿠데타 등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생긴 정치상의 큰 변동"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쿠데타라고 해도 그만이고 군사정변이라 해도 그만인데, 군사정변이란 말에 대해서도 난처해하는 장면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말이란 묘한 분위기를 가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긴 하다. 다 같은 말인데도, 나도 쿠데타라고 하면 군사정변에 비해 훨씬 더 폭력적으로 느끼고 있다.

 

어쨌든 그런 용어, 그런 답변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새로 연구하면 된다. 난처해 하고 골탕을 먹이고 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기야 내노라 하는 학자들이 남의 나라 역사도 아니고 바로 이 나라 역사에 대해 그것도 뻔한 문제를 가지고도 결론을 내지 못해 판사더러 해결해 달라고 하는 나라이니, 1993~1994년의 그 편수국에서처럼 오랫동안 큰 말썽없이 사용될 수 있는 용어를 정할 수 있을지 걱정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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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일보, 2013.3.2,A27. "청문회장의 '5.16 愚問愚答' 보기 민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