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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이 주말에 열차를 타고 다녀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내외가 시골에 산다는 걸 실감했다고 했습니다. 모처럼 열차를 탔으므로 한가로이 차창 너머로 전개되는, 그것도 이 겨울 눈 덮인 산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부자들 별장처럼 이곳보다 더 멀리 떨어진 시골에 허름한 집이라도 한 채 마련했으면 좋겠지만, 다 틀린 일이니까 내 처지엔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여기가 '딱'이야."
이중환이 『택리지擇里志』(李重煥 著 / 李翼成 譯, 『擇里志』乙酉文化社, 1981, 7版)에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복거총론(卜居總論)'의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저 살 터를 잡는 데에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다음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며, 다음 인심(人心)이 좋아야 하고,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그런데 지리는 비록 좋아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곳이 못되고, 생리는 비록 좋더라도 지리가 나쁘면 또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함께 좋으나 인심이 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게 되고, 가까운 곳에 소풍(逍風)할 만한 산수가 없으면 정서(情緖)를 화창하게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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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택리지』에서 현실적으로 와닿은 부분을 딱 한 군데만 고르라면, '복거총론(卜居總論)' 중 산수(山水)편의 결론이 그곳입니다.
대저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野)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박한 곳이 많다. 사람이 이미 자라처럼 모래 속에 살지 못하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지 못하는데, 한갓 산수만 취해서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十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거리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매양 생각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대저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野)스러워진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게다가 "十리 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거리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매양 생각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라고 한 부분은 얼마나 절묘합니까!
그렇다고 요즘 사람들이 이중환의 그 책을 읽고, '그래, 나도 이만하면 살 만하니까 이제 시골에 별장을 하나 마련해서 주말에 다녀오며 지내면 좋겠구나!' 하는 건 아니겠지만, 여유가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할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줄 누가 모릅니까?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드나들며, 차를 타고내릴 때마다 저 산이나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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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령 내가 바라보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저 산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표정을 보여주고, 그 모습도 다르게 보이고, 심지어 그 크기조차 다르게 보이고, 더구나 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정경이 하루라도 같지 않게 해주므로 하루에 몇 번을 본다 한들 지루할 리가 없습니다. 사람과 다릅니다. 사람은…… 저처럼 마침내 이렇게 어설프게 스러져 가는 것인지…………
아! 사람도 저와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와 같다면…………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저와 같다면, 저 산처럼 보일 수 있다면…………
나는 다만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던 몇 년 간의 그 시간에,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면, 말썽이나 피우는 작은 악마들이 아니고,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걸 알 수 있었으니, 그걸 알아내고 돌아와 있을 수 있었으니, 한 '교육자'로서는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