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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다시 병원에 가기 싫은 이유

by 답설재 2012. 9. 24.

"네. 그러나 요도호스는 곧 끼워야 한대요. 괜히 고집을 부리다 오줌이 방광에서 넘쳐 신장으로 역류하면 병이 신장에까지 확대되니 시급하답니다."

간호사는 몸집이 조그마하고 눈빛이 반짝여 야무져 보였다. 그녀는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강택수의 성기를 주물럭거리고 요도호스를 끼웠다. 강택수가 아파 낮은 비명을 질렀다.

 

간호사는 기구를 챙겨들고 사무적인 잔웃음을 띠고 사라졌다. '깜찍한 아가씨로군……' 강택수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요도호스를 통해서 오줌이 콸콸 쏟아져 곧 오줌주머니에 오줌이 가득 차 불룩해졌다. 강택수는 곧 화장실로 가서 오줌을 비우고 납작해진 오줌주머니를 들고 돌아왔다.

 

 

어느 소설의 한 부분입니다.1 이 부분을 읽다가 생각났습니다. '다시 병원에 가면 안 되는데……'

 

 

 

우선 간호사들이 저렇게 해주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성기에 요도호스를 끼운 간호사가, 사무적으로라도 잔웃음을 띠는 경우가 있을까 싶습니다──그런다고 그 고통에 대한 위로가 되지도 않겠지만──. 물론 저처럼 꾀죄죄한 사람이 아니고 훤칠한 남성에겐 저렇게 해주는 간호사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요도호스를 끼웠다고 해서 오줌이 콸콸 쏟아진다면 걱정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저렇게 시원하게 쏟아져 주는지 그것도 의심스럽지만, 저의 경우에는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간호사가 좀 떨어진 곳에 있거나 옆에서 지켜보며 "다 나왔느냐?" "이것밖에 없다면 왜 참을 수 없었느냐?"는 투로 중얼댔습니다. 마치 제가 다른 뜻이 있어서 일부러 요도호스를 끼워달라고 했다는 표정이기도 했습니다. 저의 경우는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오줌이 콸콸 나왔다고 쓴 저 부분만으로는 소설 속의 강택수라는 인물이 왜 요도호스를 끼웠는지 그것부터 의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이 오줌주머니를 들고 화장실로 가서 비웠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화장실에 가지 왜 요도호스를 끼웠는지(저속한 표현을 하면 "미쳤다고?"), 나로서는 그것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지금 저를 살려준 그 병원을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냥 칠칠하지 못한 나의 경우는 참 어려웠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다시 병원에 가기 싫은 첫째 이유가 이 요도호스 때문입니다. 정말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고……

하룻밤 정도라면 까짓거 방광이 고무풍선이 되거나말거나 참을 것입니다. 그러나 3박4일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중환자실이니까 가슴이고 어디고 기계로 이어진 무슨 호스가 주렁주렁 달려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해놓았다면? 평소에 운동을 많이 하여 팔다리가 무쇠 같은 축구선수나 모자에 별을 단 무서운 장군이라도 아마 별수없을 것입니다.

 

밥은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물은 마셔야 살고, 일부러라도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순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나 수필 같은 걸 읽어보면 수술을 받으러 갈 때는 일쑤 무슨 마음의 정리 같은 것도 좀 하고 그러는데, 나의 경우에는 수술대에 두번째로 누웠을 때도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까짓거 죽기야 하겠나 싶었고──이번에 죽을 수도 있다는 문서를 읽어보고 '잘 알겠다'는 뜻으로 사인(sign)까지 해놓고도 죽지 않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는 것에 기대어 그 확신을 '신념'처럼 간직하고── 좀 더 직접적·현실적으로는 한국의 의술 혹은 그 병원의 수준, 심지어 막연하게 '나의 운명' 같은 걸 믿었고──'설마 내가 이렇게 일찍 죽기야 하겠나'── 구체적으로는 제법 큰돈이 또 들어가게 되었고, 게다가 나를 찾아와야 하는 자식들에게는 할 일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어 미안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수술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가서는 이내 '아하!' 했습니다. 다시 그 요도호스를 사용해야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요도호스를 두 번째로 사용하면서, 앞으로는 정말로 병원에 다시 실려오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짐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그 진저리나는 요도호스 때문에 자신이 더욱 한심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겨울밤, 세 번째로 그 병원에 실려가 응급실에서 밤을 새운 다음 다행히도 그 위급 상황이 사라져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새벽에는 요도호스 신세를 모면한 것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러다가 또다시 병원에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이렇게 오락가락하다가 아예 죽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우선 나를 만나봐야 하거나 내 가족을 만나봐야 할 몇 사람은, 귀찮은 일이라는 걸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무슨 핑계를 대며 누구에게 부조나 전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2박3일이라는 시간의 범위에 쫓기며 내 시체가 있는 그 병원을 다녀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 누구나 어차피 한번은 겪는 일이지. 영 갔는데야 어쩔 수 있나. 바쁘고 성가셔도 다녀가야지.'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그렇게 다녀가면 그것으로 그들의 할 일은 끝난 거지요. 무슨 할 일이 또 남습니까? 그들은, 아직은 자신들은 나와 같은 길을 가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심하면서 그 병원을 나서면 나와의 관계는 영영 끝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심지어 그렇게 궁금하던 하늘나라나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 지옥이 어떤 곳인지, 단 한 가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은, 영웅호걸이라도 별수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럴 경우 '큰일났다' '하늘이 노랗다'고 느낄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고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나는 제 아내를 떠올립니다.

거기에 더할 사람이 있는지, 구태여 그런 사람을 더 떠올릴 필요가 있는지, 그건, 혹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각각 자신의 입장대로 판단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다만, 내가 죽고 나서도 세상은 하나도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건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버스도 그대로 다니고 전철도 물론 그대로 운행될 것입니다. 연락을 하지 않으면 신문도 그대로 배달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내에게는 당장 변화가 일어납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면, 우선 혼자 있게 됩니다. '혼자, 혼자……. 나는 없고 저 사람 혼자서 서성거리고 무슨 꼭 해야 할 일을 찾고 먹고 마시고 텔레비전을 보고 문단속을 하고…………' 심지어 악몽에 시달려도 잠을 깨워줄 사람이 없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도 혼자일 것입니다. 아니 일어나 보면 내가 없을 것입니다. 저녁에도 혼자 있다가──혹 처음 며칠 동안에는 누군가가 뭐라고 위로하는 전화라도 해줄지도 모르지만── 결국 혼자서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저 쪽에 책장이 있는 곳이나 컴퓨터 앞에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익숙해지면 잘 살아갈 수 있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처럼 낯선 일상이 전개될 것입니다.

 

 

♬\

 

나는 이렇게 둘이서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상 속에 무슨 큰 보람이 있거나, 이 컴퓨터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행복감을 느끼거나 함으로써 그 보람이나 행복감 때문에 그 보람이나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아프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병원에 실려가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나는 단지 내일도 그냥 이대로 어제처럼 오늘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살아가는 일에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멋지게 사는 사람, 분주하게 사는 사람, 지위가 높거나 부자인 사람이 보면 참 바보 같겠지만 나로서는 아무리 따져 봐도 그럴 뿐입니다.

 

"당신은 왜 내일도 살아 있어야 합니까?"

누가 그렇게 물으면 나는 그냥 이 평범한 생활을 가능한 한 언제까지라도 계속하고 싶을 뿐이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도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신문을 좀 보다가 이것저것 소지품을 챙겨서 버스와 전철을 타고 사무실에 나왔다가, 시간이 되면 다시 전철과 버스 혹은 택시를 타고 들어가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도 보고 웬만하면 헬스도 다녀오고 컴퓨터에서 이 블로그를 들여다보다가 잠자리에 들고 싶을 뿐입니다.

 

 

 

'사는 게 뭐 이런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일인가?'

'이럴 수밖에 없다면 나는 결코 대단한 존재가 아니지 않는가?'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알베르 까뮈가 "그건 정상"이라고 써놓은 걸 발견했습니다.2

 

많은 이유들로 해서 우리는 생존이 명령하는 활동을 계속하게 되는데, 그 이유들 중 첫 번째가 습관이다.3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 속에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불행들보다 강한 무엇이 있다. 육체의 판단은 정신의 그것과 다름 없는데, 육체는 소멸을 꺼리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을 얻기 전에 먼저 살아가는 습관에 빠지게 된다. 나날이 죽음을 향해 우리를 재촉하는 이 경주 속에서 육체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우선권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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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유상 「딸」(단편소설) 『현대문학』 2011년 11월호, 116~146쪽.
  2.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18, 20~21쪽.
  3. 이 부분에 대해 까뮈는, 스스로 원하여 죽는다는 것은, 그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특질을, 살아야 할 그 어떤 심오한 이유도 없음을, 그 나날의 소란의 어처구니 없는 특질을, 그리고 고통을 견디며 사는 것의 무익함을 본능적으로나마 인식해 왔음을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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