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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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어느 날, 블로그 친구 블랙커피님께서 수세미 씨앗 열 개를 보내주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전통시장에서 길이 1미터가 넘는 수세미를 사다가 효소를 만들었는데 그게 썩어버려서 애석해 했더니 한번 직접 가꾸어 보라며 보내준 씨앗입니다.
그래, 그걸 고이 간직했다가 4월 초순 어느 날 사무실 뒷뜰에 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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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을 심은 바로 그 이튿날입니다. "새봄이 왔다!"고 좋아한 관리소장이 꽃을 가꾸겠다고 하필이면 수세미 씨앗을 뿌린 그곳의 흙을 파서 화분에 담아버렸으니 수세미 구경을 하기는 틀린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을러서 수세미 가꾸는 일을 잘 하지도 못할 주제이니 차라리 잘된 일일까?'
그러나 생명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잊고 지내던 어느 늦은 봄날 아침, 관리소장이 만든 여러 개의 화분 중 한 곳에서 두 포기의 수세미 싹이 올라왔습니다.
그것이 자라서 지금은 재단 건물 담모퉁이를 저렇게 꾸며주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물론, 1층의 카페 베네, 2층의 성형외과, 3층의 치킨 프렌차이즈 체인점, 지하층의 노래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다른 화초와 함께 어우러진 저 덩굴을 쳐다보며 신기해 합니다.
"아! 저게 수세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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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한 것은 싹이 너무 늦게 올라와 수세미가 달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들여다볼 때마다 사람들이 이렇게 위로합니다.
"저 덩굴 보는 것만 해도 좋은 일 아니에요? 내년엔 일찍 심어보세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럴게요. 수세미를 하나씩 따 드릴게요."
수세미가 달리면 하나씩 나누어 주겠다는 말을 하면 1950년대의 그 시골 초등학교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학교 뒷뜰 실습지에서 주로 고구마 농사를 지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땅을 파 헤집을 때마다 총알과 총알 껍데기가 수북수북 나왔습니다.
고구마를 캐는 날에는 교장선생님께서 그걸 다 삶아서 아이들에게 몇 개씩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찐고구마를 먹는 모습을, 진두지휘하신 교장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학교를 의심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더 많이 먹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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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제 친구 블로거 블랙커피님이 저 사진을 보면 쓴웃음을 지을 것입니다.
'그 좋은 씨앗을 보냈더니 겨우 저 꼴이라니……'
블랙커피님은 키가 훤칠하고 인물이 훤합니다. 사진에서 그러니까 실물은 더 멋지겠지요. 반면에 저는 까무잡잡하고 나즈막하니까 수세미조차 저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식물도 큰 녀석은 사람을 보호하려 듭니다. 커다란 나무 화분을 책상 옆에 두고 앉아 있으면 그 녀석이 자꾸 사람 곁으로 가지를 벋어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그마한 화초는 자꾸 사람의 눈길을 끌어서 보호 받으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걸 좀 보살펴 주려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이래저래 식물의 도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블랙커피님께는 부끄러운 일이 벌어졌지만, 어쨌든 고맙지 않습니까? 저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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