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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저 생명력!

by 답설재 2012. 8. 21.

 

 

 

 

 

 

 

 

 

저 생명력!

 

 

 

 

 

 

 

  지난해 어느 날, 블로그 친구 블랙커피님께서 수세미 씨앗 열 개를 보내주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전통시장에서 길이 1미터가 넘는 수세미를 사다가 효소를 만들었는데 그게 썩어버려서 애석해 했더니 한번 직접 가꾸어 보라며 보내준 씨앗입니다.

 

  그래, 그걸 고이 간직했다가 4월 초순 어느 날 사무실 뒷뜰에 심었습니다.

 

 

 

 

  씨앗을 심은 바로 그 이튿날입니다. "새봄이 왔다!"고 좋아한 관리소장이 꽃을 가꾸겠다고 하필이면 수세미 씨앗을 뿌린 그곳의 흙을 파서 화분에 담아버렸으니 수세미 구경을 하기는 틀린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을러서 수세미 가꾸는 일을 잘 하지도 못할 주제이니 차라리 잘된 일일까?'

 

  그러나 생명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잊고 지내던 어느 늦은 봄날 아침, 관리소장이 만든 여러 개의 화분 중 한 곳에서 두 포기의 수세미 싹이 올라왔습니다.

  그것이 자라서 지금은 재단 건물 담모퉁이를 저렇게 꾸며주고 있습니다. 이 재단은 물론, 1층의 카페 베네, 2층의 성형외과, 3층의 치킨 프렌차이즈 체인점, 지하층의 노래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다른 화초와 함께 어우러진 저 덩굴을 쳐다보며 신기해 합니다.

 

  "아! 저게 수세미에요?"

 

 

 

 

 

 

 

 

 

  애석한 것은 싹이 너무 늦게 올라와 수세미가 달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들여다볼 때마다 사람들이 이렇게 위로합니다.

  "저 덩굴 보는 것만 해도 좋은 일 아니에요? 내년엔 일찍 심어보세요."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럴게요. 수세미를 하나씩 따 드릴게요."

 

  수세미가 달리면 하나씩 나누어 주겠다는 말을 하면 1950년대의 그 시골 초등학교 생각이 납니다. 우리는 학교 뒷뜰 실습지에서 주로 고구마 농사를 지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땅을 파 헤집을 때마다 총알과 총알 껍데기가 수북수북 나왔습니다.

  고구마를 캐는 날에는 교장선생님께서 그걸 다 삶아서 아이들에게 몇 개씩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찐고구마를 먹는 모습을, 진두지휘하신 교장선생님과 여러 선생님들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학교를 의심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더 많이 먹겠지?"

 

 

 

 

  그나저나 제 친구 블로거 블랙커피님이 저 사진을 보면 쓴웃음을 지을 것입니다.

  '그 좋은 씨앗을 보냈더니 겨우 저 꼴이라니……'

  블랙커피님은 키가 훤칠하고 인물이 훤합니다. 사진에서 그러니까 실물은 더 멋지겠지요. 반면에 저는 까무잡잡하고 나즈막하니까 수세미조차 저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식물도 큰 녀석은 사람을 보호하려 듭니다. 커다란 나무 화분을 책상 옆에 두고 앉아 있으면 그 녀석이 자꾸 사람 곁으로 가지를 벋어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그마한 화초는 자꾸 사람의 눈길을 끌어서 보호 받으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걸 좀 보살펴 주려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이래저래 식물의 도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블랙커피님께는 부끄러운 일이 벌어졌지만, 어쨌든 고맙지 않습니까? 저 생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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