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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외롭고 무서우면

by 답설재 2012. 8. 19.

 

 

 

  그게 나에게 희망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나 절에 가보면 좋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는 사람이 주변에 아직은 남아 있습니다. 지금 데려가도 헌금을 모으는 등의 일에 약간의 쓸모가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겠지요. 다만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측은하다', '그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왜 이렇게 있느냐?'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목사가 설교를 해주고 신자들끼리 돈독하게 지낼 수 있는 교회에 나가면 덜 외로울 것입니다. 땡땡이중이 있는 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요일에 그런 곳 주변을 지나가 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가물가물하게 이어진 주차 행렬도 볼 수 있고,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외롭기는커녕 더없이 다정한 마음으로 서로를 감싸주며 살아갈 것 같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은 외로운 게 좋습니다. '좋다'는 게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괜찮다'고 하면 좋겠습니다. 나도 물론 외로우면 혼자서 끙끙댑니다. 그렇게 끙끙대면서도 좋다, 괜찮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성당이나 교회가 싫으시면 하다못해 절에라도 나가시지 그러세요?"

  내가 병이 들고 몸이 불편해서 그런 권유를 하는 걸까요? 아니면, 이제 곧 죽을 텐데 영생(永生)을 구해야 할 것 아니냐는 뜻일까요?

 

  "더 살고 싶나?"

  그렇게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결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니요. 다만 두려울 뿐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나도 한시라도 더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칠 것이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그건 지금 이성적으로 준비한 답변이라는 뜻입니다.

 

  "그래? 두려우면 교회에 나가면 돼. 털어놓고 말하면 죽는 게 두려워서 교회나 절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두려워서 교회에 나간다는 게 웃기지 않아요? 두려움은…… 죽음이, 아무도 그것으로부터 돌아오지 않은, 어떤 것인지 알려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미지(未知)의 것이기 때문이잖아요? 천당? 극락? 나는 좀 웃기는 것 같아요. 그걸 위해 종교를 갖는다는 건 나로서는 참 유치한 것 같아요. 괜찮으니까 부디 나를 그냥 두세요. 이렇게 해서는 못살겠다 싶으면 나도 갈게요. 사실은 부처가 부럽기는 해요. 부처는 무얼 믿고 저승으로 갔을까요? 그걸 알면 나도 그렇게 가고 싶어요. '나도 이제 갈게요. 하고."

 

 

 

 

  사막의 석가모니를 생각해 보라. 그는, 사막에서 눈을 하늘에 둔 채 꼼짝 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몇 년 간을 똑바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신(神)들은 그의 지혜와 돌 같은 숙명을 질투했다. 내밀어진 그의 두 손에다 제비들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날, 먼 나라들의 부름에 답하여 제비들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욕망과 의지와 명예와 고뇌를 눌러 왔던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바위 위에서 꽃이 피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 돌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돌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우리가 여러 얼굴들에게서 구하는 그 비밀스러움과 그 광희는 또한 돌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영속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영속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얼굴들의 비밀스러움은 시들어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욕망의 사슬로 되돌아가 있다. 그리고 돌이 우리에게 인간의 가슴보다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의 가슴만큼은 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오, 무(無)로 돌아가리라!」 이 커다란 외침은 수천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욕망과 고통에 반항하도록 일깨워 왔다.

 

 

                                                                              알베르 까뮈, 「미노토르──오랑에서의 체류」(철학 에세이) 중에서

                                                                              (출처 : 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범문사, 1993), 부록, 228쪽)

  

 

 

  C.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동료가 "너는 내가 하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어"라고 내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도 이미 네 번씩이나 절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을 존중해서 나는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이것은 자신감에서라기보다는 분별심에서였다. 그는 내가 그의 신앙에 동의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중략)… 참배의 형식과 자신 사이를 방해하는 오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우상에 절을 한다거나 사물의 어떤 가상적인 초자연적 질서를 숭배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사상가에 의해서 또는 그의 전설을 창조하였던 하나의 사회에 의해서 2,500년 전에 형성되었던 결정적인 명상들에 대해 다만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나의 문명은 이같은 명상들을 확신함으로써만이 그것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내가 경청하였던 대가들로부터, 그 사상을 읽어보았던 철학자들로부터, 조사해보았던 사회들로부터, 그리고 서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과학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배워왔던가? 내가 배워왔던 것은 만약 그것들의 끝과 끝을 연결시켜본다면, 현자(賢者)의 나무 아래에서 그 현자의 명상들을 재구성하는 한두 개의 단편적인 교훈에 불과하다.

                                                                              

                                                                               C. 레비-스트로스·박옥줄 옮김, 『슬픈 열대』(한길사, 1998, 737~738쪽).

 

 

 

 

  그만 가야 하겠다고 대답했을 때, 그럼 마지막으로 바라는 걸 이야기하라면, 그곳에 가서 ──그곳이 어떤 곳이라 하더라도── 나의 어머니, 마흔여덟에 심장병으로 가신, 나보다 훨씬 초라하신 그분, 너무나 오랜만이어도 "엄마……" 하고 불러 병들어 누추해진 몸이지만 한번 보여드리고 싶은 그 어머니를 만나고 싶긴 하다는 것입니다. 낳아주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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