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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제7차…" 하면, "야! ○○○!"으로 들리던 시절

by 답설재 2012. 3. 26.

 

누가 "제7차 교육과정" 어떻고 하면 나에게 유감이 있어서 "야! ○○○! 너 이리 와봐!"라거나 "○○○, 그 녀석 어떻고……" 하는 걸로 들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때는 자주 들렸기 때문에 '이러다가 제 명에 죽을 수나 있을까?' 싶기도 했었습니다.

 

 

 

제7차 교육과정 때문에 원망을 들은 장관들은 여러 명입니다. 그 중에는 객관적으로는 억울한 장관도 있고, 책임을 져야 마땅한데도 그렇게 할 기회를 갖지 못한 장관도 있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억울하다"는 건 그 장관은 제7차 교육과정의 '제'자도 꺼낸 일이 없고 다만 장관이 되어 그 교육과정의 시행을 독려하는 소임을 다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that) 장관은 제7차 교육과정의 원흉!"이라며 몰아세운 경우입니다. 그런 입장의 장관이 제가 보기로는 적어도 두세 명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책임을 져야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경우'는, 내가 들은 바로는, 가령 재량활동 시간을 교육개혁위원회의 제안보다 '좀' 줄여서 교육과정의 개혁·변화 면에서 '좀' 완화된 시안을 확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간파하고 단칼에 원안으로 회귀시킨 장관이 있었지만, 당시 교육부장관은 1년 안팎의 단명(短命)이었으므로 사실은 책임을 지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시기에 장관을 지낸 경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995년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에서는 '정보화·세계화 시대에 대비하여 신교육 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방안'을 발표하고, '교육과정특별위원회'를 두어 그해 연말까지 학생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다양한 학습을 할 수 있도록 ① 필수과목 축소 및 선택과목 확대, ② 정보화·세계화 교육 강화, ③ 수준별 교육과정 편성·운영을 교육과정 개선 원칙으로 하는 교육과정 개정 기본골격을 마련하였습니다. 교육부에서는 이에 따라 1996년 3월에 교육과정 개정계획을 수립하고, 한국교육개발원에 시안 개발을 위탁하여 1997년 12월 30일에 개정 고시된 것이 제7차 교육과정입니다. 또 이 시기의 장관은 박영식(1995.5.16~1995.12.20.), 안병영(1995.12.21~1997.8.5.), 이명현(1997.8.6~1998.3.2) 장관 등이었습니다.

 

제7차 교육과정은 이전의 교육과정에 비해 현장의 비판과 비난을 많이 받은 교육과정이었습니다. 아니, 그 이전의 교육과정은 비판이나 비난을 받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국민들은 '교육과정'이라는 게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고, 그래도 아무 일 없었고, 사실은 그건 교원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학교에 가봐야 교감이나 교장 딱 한 명만 교육청에서 나누어준 '교육과정' 책자를 가지고 있다가 누가 수업발표라도 하면 그걸 들고 나와서 "이게 교육과정이라는 건데, 이 책을 보면……." 하고 교사들이 듣기에는 별 희한한 말을 하는 근거로 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7차 교육과정은 역대 교육과정 중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개혁적인 내용을 많이 포함함으로써 학교현장의 급격한 변화를 요구한 면이 많았기 때문에 교원들이 '이걸 실천할 수 있겠나?' 싶어서 목소리를 높이게 되니까 교육과정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몰랐던 국민들도 비로소 '아, 교육과정이란 것이 있구나!' 했을 정도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만큼 교육과정에 관한 다양한 의견도 속출했습니다.

 

이미 일부 학년에 적용 중인데도 불구하고 교원단체와 언론, 국회 등에서 새 교육과정 자체 혹은 새 교육과정의 적용을 추진하고 있는 교육부를 비난하거나 아예 교육과정의 철폐 혹은 적용 유보, 적용 연도 연기 등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려나?' 관망하던 단체나 학교 등에서도 '우리도 반대 운동에 참여해야 체면이 서는 것 아닌가?' 싶어 뒤늦게 반대 서명 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제7차 교육과정은 그만큼 적용에 힘이 든 교육과정이었습니다.

 

 

 

이때 있었던 일들을 '주욱-'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지만 자료를 정리하기가 복잡하고 번잡하고 어렵고 짜증나는 일이어서 그런 일을 하기가 너무나 싫고 설령 정리해서 써본다 해도 자칫하면 자신이 한 일들을 자랑하는 것으로 비칠 가능성만 있으므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나?" 할 만한 몇 가지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 "제7차 교육과정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

 

나는 기나긴 6년 3개월의 교육연구사 생활을 마치고(파견 3년을 더하면 근 10년이었으니까 누가 봐도 '기나긴'이었다고 할 만하겠지요), 1999년 9월 1일에 서울 Y초등학교 교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나가 그날부터 당장 다 잊어버리고 잘 지내다가 6개월만인 2000년 3월초에 "교육과정 적용 지원"이라는 특명으로 장학관 발령을 받았습니다. 교감 6개월에 일약(一躍) 장학관이 되다니! 이어 2년 후인 2002년 3월에는 교육과정정책과장 발령을 받았고, 새 교육과정이 고등학교 3학년까지 적용된 2004년 9월 1일에 교직생활 5년 6개월을 남기고 교장 발령을 받아 현장으로 나왔습니다.

 

당시 교육부 직원이나 교원들 중에는 저를 빗대어 뭘 좀 아는 척하며 "교육과정을 만든 사람이 적용까지 책임지고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제7차 교육과정을 만든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교육과정 개정 작업 기간에는 다 같은 교육연구사라도 선배들이 많았고, 그 위로 교육연구관, 장학관, 과장, 국장이 기라성(綺羅星)처럼 늘어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저어-' 아랫자리의 일개 '이름 없는' 교육연구사였고, 총론과 사회과, 슬기로운 생활, 우리들은 1학년 따위의 맨 끝자리 담당자 중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특수학교 교육과정은 초·중등학교 교육과정과 함께 고시하지 못했으므로, 선임자가 정리하지 못한 것을 물려받아 몇 달 간 혼자서 고군분투해서 발표했지만 누가 한번 찾아보십시오, 정작 특수학교 교육과정 담당자 명단에 제 이름은 들어가 있지도 않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제7차 교육과정을 만든 사람들 명단을 지금 들여다봐도 그야말로 기라성 같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고는 다들 어디로 뿔뿔이 사라졌을까요? 그런데도 교육과정을 만든 사람이 적용까지 책임지고 나가야 한다? '나 원 참! 교육과정 만든 사람 보지도 못했나?'

 

□ 교육이란 본래 수준별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

 

제7차 교육과정 시안을 연구·개발한 기간에 한국교육개발원(KEDI) 원장을 지낸 이돈희(李敦熙) 장관은, 2000년 8월 31일에 취임을 했습니다. 듣기로는 KEDI 원장에 이어 1999년 6월 30일, 대통령 자문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해서는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거나 긍정적인 발언을 하지 않아서 장관으로 취임하면 교육과정을 어떻게 다룰지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는 9월 4일엔가 당장 장관실에 불려갔습니다.

"김 장학관! 오늘 이 시각부터 나와 함께 전쟁에 나간 사령관의 각오로 교육과정 적용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분은 교육과정에 대한 강의는 하지 않겠다는 투로 간단하게 부탁만 했습니다. '전쟁'이라고 하니까 당장 다섯 살 때 겪은 6·25전쟁이 떠올라서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막연하고 난처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때는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반대 투쟁'도 비등하고 '이러다가 정말로 제7차 교육과정을 그만두는 게 아닌가?' 현장교원들의 의구심도 극에 달하던 때여서 오자마자 불러 직접 부탁하는 그 마음과 각오가 차라리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그날부터 나는 '전쟁'을 겪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내 강의를 듣게 하려고 울산의 초·중등학교 교원들을 모아놓은 시민회관 로비에서 "오늘 저녁 당장 KBS TV 방송국으로 가서 길중섭의 '100분 토론'에 나가라! 무슨 얘기를 할지는 현장에 가서 알아보라."는 장관실의 지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지도 못한 채 달려가 봤더니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토론의 주제로 반대하는 쪽에서는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하면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서열화하게 되고, 그로 인해 학교가 황폐화된다는 주장을 했고, 나는 "교육이란 본래 수준별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당연하므로 이건 찬성하고 반대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마치기 전에 ARS로 청취자들의 반응을 모아 발표했는데, 수준별 교육과정은 제 기억으로는 76:24의 여지없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좀 속된 표현일지 모르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오묘해서 그 이튿날부터 나는 상당히 고무적인 연락들을 받을 수 있었고, ARS 반응이 거꾸로 24:76이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로 반전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김 장학관님! 새 교육과정 적용을 유보하거나 폐지하겠지 하는 분위기였는데 100분 토론에 나와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어서 우리는 이제 망설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후로는 쉬웠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2004년 8월 31일 저녁, 그 짐을 벗는 날까지 저는, 우리 어머니의 젖이 빈약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젖 먹은 힘을 다했습니다. 속(심장)이 많이 상했고, 자주 기가 막혀서, 지금도 저는 자나 깨나 한여름 매미 우는 소리를 듣는 이명(耳鳴)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 이돈희 장관의 부탁 때문입니다. 아! 이 심장병이나 이명이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 그렇게 일할 수 있었던 그 각오와 신념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좀 쑥스러운 고백이지만 지금도 이돈희 장관이 그립습니다. 그분은 제42대 장관이었고, 그 후임은 제1대 교육부총리였는데, 교육과정을 두고 말하면 이돈희 장관은 교육부총리 자격이 충분한 분이었고, 아마 본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2001년 1월 28일, 장관을 그만두고 돌아가던 모습, 그날 그 시간 정부중앙청사 현관 앞에서 배웅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 "전문직들은 참……"

 

2001년 1월 29일, 한완상(韓完相) 제1대 교육부총리가 취임했습니다. 사나흘 후, 학교정책실 업무보고에 배석했습니다. 한 부총리는 나지막한 음성이었지만 매우 분석적이고 단호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각 과장들의 보고와 간단한 질의응답이 끝나자 부총리가 쳐다보더니 배석한 장학관들도 한마디씩 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초·중등학교 장학지도를 맡은 과의 K 장학관이 생활지도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묻지도 않았는데 앞으로는 담임 책임지도를 강화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부총리는 "그런 대책은 늘 하던 소리 아니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장학관이나 다른 이들이나 자세를 바로 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가 내 차례였습니다. '까짓 거 털어놓고 보자!'는 생각으로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현장의 비판과 비난이 드세다"는 이야기를 꺼내어 구체적인 사례를 이야기했는데, 다 듣고 난 부총리가 다짜고짜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인가?" 물었습니다. '어?' '아차!' 싶어서 단호한 대처와 치밀한 계획 추진 등을 이야기하며 다만 예산이 없어서 자료 제작이나 연수회 개최 등 필수적인 사업을 전개하지 못한다고 했더니, 이번에도 또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그래, 얼마나 필요합니까?" 이번에도 또 '어?' '아차!' 싶어서 "그야 뭐, 어떻고" 하는데 앞에서인지 등 뒤에서인지 귓속말로 "……사억 어떻고"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지는 문답으로 그 순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머뭇거리면 준비도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므로 얼른 대답했습니다. "예, 우선 십사억만 있으면 계획한 일들을 전개하여 새 교육과정의 현장적용을 잘 준비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총리는 다짜고짜 지시를 했습니다. "기획관리실장님, 오기 전에도 들었지만, 교육과정은 중요한 문제 같은데, 저 요청을 들어줄 수 있겠지요?"

 

그 업무보고에서 나는 당장 십사억 원을 받게 되었는데도, 마치고 나오자 두 가지 이야기가 내 입장을 난처하게 했습니다. 우선 "이십사 억이라고 했는데 그걸 잘못 알아들어서 십억을 손해 봤다"는 얘기를 들었고, 외부적으로는 이런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전문직들은 참, 장학관 한 명은 담임 책임지도 얘기를 꺼내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고, 다른 한 놈은 장관도 아니고 처음으로 부총리가 왔는데 겨우 십사억 원을 달라고 했으니……."

 

이제 와서 얘기해봐야 소용도 없지만 나도 두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돈 달라는 얘기도 선뜻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사억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할 것 아니냐?"는 것과 "만약 새로 온 부총리 앞에서 돈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으면 십사억을 내놓았겠느냐? 교육과정 때문에 죽겠다고 해도 순순히 내놓을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과에서는 그해에 그 십사억 원을 적재적소에 요긴하게 쓰느라고 고생을 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그해부터 매년 특별교부금을 받으며 교육과정 현장적용에 관한 각종 장학자료 제작, 교육과정 연수에 열을 올렸습니다.

 

□ "또 이러면 행정소송을 하겠다!"

 

제7차 교육과정은 1999년 전반까지는 조용하던 학교현장에 소용돌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제7차 교육과정의 이상은 개인별 학습 차이를 인정하고, 학생들에게 자율적인 학습 선택권을 부여하여 개인이 수준에 맞는 과목 혹은 학습내용을 선택할 수 있는 '학생중심의 교육과정'으로, 교육선진국에서는 이미 시행 중인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령 전교조는 "수준별 선택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있어도 실상은 경제적 계층에 따라 수준이 정해지는 우열반 편성과 영어 수학 중심의 입시경쟁을 전면화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습니다.

 

그 소용돌이가 정점을 달려 '집단가투'(조선일보, 2001.10.30, 기사 "교사들의 '집단 街鬪'" 참조)까지 벌어지던 2001년 가을의 사정을 보여주는 신문기사를 하나만 찾아보면, 조선일보 2001년 10월 30일(화), 9면 전면의 '긴급진단 : 다시 들끓는 교육현장'(양근만 기자 yangkm@chosun.com)을 들어도 될 것입니다. 「의견수렴 없는 밀이붙이기에 교사·학생 모두 반발」이라는 큰 제목 아래 ▷ 교총 "우열반 부활 우려" 7차 교육과정 반대, ▷ 전교조 "입시명문고化" 자립형사립고 철폐투쟁, ▷ 교대생 "초등교사 전문성 무시" 중초교사 반발, ▷ 교육부 "선진국에선 다하는데 왜들 반대하나" 등이 작은 제목들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첨부된 표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조선일보, 2001.10.30. 9면.

 

 

이런 현상은 현장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에게서도 "문제가 있다"는 견해가 발표되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펴낸 제7차 교육과정 운영을 위한 학교급별 시설 공간 요건 분석 연구 보고서는 "초등학교 1·2학년의 경우 7차 교육과정에 필요한 교재와 교구를 마련하고 실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교구 종류와 소요량 조사 연구도 아직 실시된 바가 없어 예산 편성과 교육과정 운영에 괴리가 생길 것"이라고 지적했다(2000.11.6, ○○일보).

 

한국교육과정평가원 ○○○ 연구위원은 국어·도덕·사회·수학·과학·실과·체육·음악·미술·외국어 등 10개 국민공통기본교과목을 모든 국민들에게 필수로 부여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이 교과목들이 적합한지를 근본적으로 되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 21세기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학교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교육과정이 탄력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데 7차 교육과정은 국가수준에서 낱낱의 선택 교과목까지 정해놓고 있어 융통성 있는 교육과정 운영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2000.11.1, ○○일보).

 

이 기사들 때문에 장관실에 불려갔던 저는 사무실로 돌아와 누군가에게 당장 전화를 했습니다. "이 교육과정 원안을 누가 만들었지요? 이런 인터뷰 또 보이면 저도 이제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이건 교육과정 잘못 만든 사람들 때문에 국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으니까 그야말로 행정소송감이지요."

그날 그 순간부터 교육과정 개정에 참여한 학자들이 교육과정의 적용에 힘을 보탰는지 어쨌는지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이것저것 이치를 따져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니까요.

 

□ "교육과정에 대한 시비로 우리 교육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입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교육광장』이라는 저널에 멋진 권두언이 실렸습니다. 곽병선 한국교육개발원장이 쓴 글이었습니다. 내용이 다 생각나지는 않지만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시비로 우리 교육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그분은 그 글에서 영국에서 있었던 이런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1988년에 영국의 국가 교육과정이 처음으로 도입될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데니스 노턴이라는 세계적인 교육과정 학자에게 누군가 이렇게 질문했답니다. "귀하가 반대한 국가 교육과정을 정부가 결국은 도입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그러자 데니스 노턴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결정을 위한 논의의 과정에서는 앞장서서 반대했지만, 이제 교육과정을 도입하는 것으로 결정됐으므로 자랑스러운 영국의 국가 교육과정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하자는 것이 내 입장입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곽병선 원장은 이 일화를 소개하며, 우리의 갈 길은 교육내용을 변화시키자는 것으로 교육방법은 여건을 보아가며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조정해가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권두언 하나로 현장이 돌변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글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많이 변했습니다. '아, 그래! 가야 한다. 이 길이다! 어디까지든, 내가 얼마나 망가지든 나는 가야 한다! 가고 말 것이다!'

곽 원장이 소개한 데니스 노턴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 교육과정 서문의 다음과 같은 문장입니다.

 

The curriculum is mirror that reflects America's dreams for its next generation. It is through the school curriculum that Americans attempt to translate their values into reality. Therefore, no area of this nation's schooling has such a difficult, complicated, and dramatic history as the school curriculum.

-ArthurK. Ellis, James A. Mackey, Allen D. Glenn(1988), The School Curriculum, Massachusetts : Allyn and Bacon. P.3.

 

교육과정은 미국의 미래 세대를 위한 꿈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 미국인들이 우리의 가치관을 실현하려는 시도(試圖)는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학교교육에서 학교 교육과정처럼 어렵고, 복합적이고, 드라마틱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졸역).

 

현장의 비판에 골몰하던 그 즈음에 P 연구관이 찾아서 보여준 이 문장을 저는 두고두고 되새겨보게 되었으며, 학교에 나가서는 무슨 기념패처럼 새겨 서장에 두었고, 그걸 지금도 버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런 각오도 합니다. '요원한 일이지만 우리나라 교육자들이 교육과정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삼을 때까지 이 사례를 소개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교육과정을 소홀히 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1993~1999, 2000~2004 사회과 편수관, 장학관, 교육과정정책과장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편수의 뒤안길, 제11집(2012.3.30), 10~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