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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이야기

『변신』

by 답설재 2012. 3. 15.

프란츠 카프카 『변신·시골의사』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09 (1판47쇄)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었는데, 고개를 약간 들자, 활 모양의 각질(角質)로 나뉘어진 불룩한 갈색 배가 보였고, 그 위에 이불이 금방 미끄러져 떨어질 듯 간신히 걸려 있었다. 그의 다른 부분의 크기와 비교해 볼 때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가 눈앞에 맥없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찌된 셈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꿈은 아니었다. 그의 방, 다만 지나치게 비좁다 싶을 뿐 제대로 된 사람이 사는 방이 낯익은 네 벽에 둘러싸여 조용히 거기 있었다.

 

『변신』의 처음 부분이다.

외판원 '잠자'가 어느 날 돌연 한 마리 커다란 벌레로 변했다. 그럼에도 허황된 이야기라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모두 당연한 '사실'로 느껴져 '세상에! 이럴 수가!' 싶고, 무섭고, 때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가도 금방 다시 심각해지면서 그 스토리 전개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숨돌릴 겨를도 없이 몰입하게 된다.

심지어 내 등에도 혹 단단한 각질의 덮개가 생기고, 내 몸의 여기저기에서 곧 무수한 다리들이 생겨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일 때도 있다.

 

 

 

 

새로 읽은 것인데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다. 이 일이 어떻게 되어 나갈지 궁금해진다. 그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그렇게 전개되는 것이 당연하고 너무나 상식적인데도 긴장감을 뿌리칠 수가 없다.

잠자가 벌레로 변한 걸 본 어머니와 아버지의 반응은 이렇다. 얼마나 실감 나는 이야기인지 어느 부분을 봐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몸의 움직임을 억제하느라고 좌우로 흔들거리며, 어머니로부터 전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바로 어머니를 마주 보며 마룻바닥에 엎드려 있는 그 순간, 아주 넋을 잃고 있는 것 같던 어머니가 느닷없이 팔을 쭉 뻗치고 열 손가락을 활짝 펼치며,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맙소사, 사람 살려요!」 머리는 그레고르를 더 잘 보려는 듯이 숙였는데, 몸은 반대로 정신없이 빨리 뒷걸음질쳐, 자기 뒤에 상을 봐놓은 식탁이 있다는 것도 잊고, 식탁 곁에 이르자 넋이 빠진 사람처럼 황급히 그 위에 올라앉았는데 옆에서 건드려 넘어진 커다란 주전자에서 커피가 다 쏟아져 양탄자 위로 엎질러지는 것조차 알아차릴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인정사정없이 몰아대면서 아버지는 야만인처럼 씩씩거렸다. 그런데 그레고르는 뒷걸음질은 전혀 익히지 않은 터라 정말이지 몹시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레고르가 몸을 돌리게 내버려두기만 했더라면 금방 자기 방으로 들어갔겠으나, 시간을 잡아먹으면서 몸을 비잉 돌렸다가는 아버지를 참지 못하게 만들까봐 두려웠고, 순간순간 아버지의 손에 들린 단장으로부터는 그의 등허리나 머리에 치명적인 일격이 날아올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국 그레고르에게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뒷걸음질치면서는 방향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음을 경악하며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여 그는 아버지 쪽으로 끊임없이 겁먹은 곁눈질을 보내며 한껏 잽싸게, 그러나 실제로는 몹시 느리게, 몸을 틀었다. 아버지가 그의 선의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멀찌감치서 단장 끝으로 이리저리 몸을 틀 방향을 지휘해 주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이 견딜 수 없는 싯싯 소리만 내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알베르 까뮈는 이렇게 썼다.

 

《변신》은 분명 어떤 명징함의 윤리에 대한 끔찍한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신이 쉽사리 짐승으로 변하는 것을 의식할 적에 인간이 느끼는 그 엄청난 경악의 산물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비밀은 이러한 근본적인 다의성(多義性)에 있다.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 개인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비극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부조리한 것과 논리적인 것 사이를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는 이러한 모습은 그의 작품 전체에 걸쳐 발견되며, 또한 그의 작품에 그 공명(共鳴)과 그 의미를 부여해 준다. 이러한 것들은, 이 부조리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낱낱이 열거되어야 할 역설들이며, 증강되어야 할 모순들이다.

실제로 하나의 상징은, 두 개의 차원을, 관념과 감각이라는 두 개의 세계를, 그리고 그들 간의 교감의 사전(辭典)을 가정한다. 이 어휘집은 작성하기가 가장 힘든 물건이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는 그 두 세계에 눈뜨는 것은 그들의 비밀스런 관계의 실마리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이 두 세계는, 한쪽은 일상생활의 세계이며 다른 한쪽은 초자연적인 불안의 세계이다.1). 게다가, 선택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두 가지 해석이 똑같이 옳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아 왔듯이, 부조리의 입장에서는, 인간에 대한 반항은 <또한> 신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위대한 혁명은 언제나 형이상학적인 것이다.(까뮈 자신의 주)"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문제들은 어디에나 있다」는 니체의 말이 끝없이 이용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조건(이것은 모든 문학의 상투적인 주제이다) 속에는 기본적인 부조리성과 함께 가차없는 고귀함이 있다. 이 양자는 당연한 듯이 일치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 양자 모두가, 우리의 영혼의 과도함과 육체의 덧없는 기쁨을 갈라놓는 그 어이없는 단절 속에서 나타난다. 부조리한 것은, 그렇게 당치 않게도 육체를 초월해 버리는 것이 바로 그 육체가 가진 영혼이라는 점이다. 이 부조리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시로 대응되는 일련의 대비들을 통해 그 부조리에 생기를 주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카프카는, 일상적인 것으로써 비극을, 논리적인 것으로써 부조리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중략)…

어쨌거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논리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을 비극적인 것에 결합시키는 그 비밀스런 연관 관계이다. 《변신》의 주인공 잠자(Samsa)가 떠돌이 세일즈맨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벌레로 변하게 되는 그 기이함 모험 속에서도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의 사장(社長)이 그가 없는 것에 화를 낼 것이라는 사실뿐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에게서 다리와 더듬이들이 자라나고, 등은 둥글게 굽어지고, 배에 흰 반점들이 나타나고, 그런데도──나는 이것에 그가 놀라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면 그 효과가 엉망이 될 테니까──그것이 그에게 <약간의 짜증>밖에 일으키지 않는다. 카프카의 전 예술이 그러한 특이성에 있다.

 

  -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육문사, 1993, 『시지프스의 신화』의 부록)에서.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의 철학.

그의 철학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시지프스가 끊임없이 바위를 굴러올리는 그 일상과, 벌레로 변신한 잠자(Samsa)의 이야기가 동일한 점을 보여주는 대목.

 

분명 집이 비어 있지는 않았건만 사방은 너무도 고요했다. 「이 얼마나 고요한 생활을 식구들은 영위하고 있는가」 하고 말하며 그레고르는 자기 앞의 어둠을 물끄러미 응시한 채 스스로가 부모와 누이에게 그러한 삶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는 데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고요, 모든 유복함, 모든 만족이 졸지에 충격으로 끝나버린다면 어떨까? 이런 생각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그레고르는 차라리 몸을 움직여 방 안을 이리저리 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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