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重煥 『擇里志』
李翼成 譯, 乙酉文化社, 1981
- 그러면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 -
Ⅰ
이중환의 『택리지』는 우리나라 곳곳의 지리(地理)와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에 대한 박물지(博物誌) 혹은 살 만한 곳을 찾을 수 있는 '매뉴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자신의 분통 터지는 내면을 밝힌 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인심이 고약해진 이유에 대해 사색당쟁(四色黨爭)을 들고, 그 진상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봉직하였으나, 영조(英祖) 원년(1725)에 형을 네 차례나 받고 이후 '동서로 유리(流離)하면서 비참하게 지냈으므로' 그러한 심정으로 살만한 곳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책의 발문(跋文)에서 스스로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살 만한 곳을 가리려 하나 살 만한 곳이 없음을 한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넓게 보는 사람은 문자(文字) 밖에서 참뜻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자(文字) 밖에서 참뜻을 구하라는 것은, 제발 정신 좀 차리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인심이 이렇게 삭막해져서야 어떻게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겠느냐는 뜻 아니겠습니까?
Ⅱ
지난번에 '『택리지』 Ⅰ'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이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이 책이 생각났습니다.
사실은 여기에 살겠다는 생각으로 아파트를 청약한 뒤에 입주 예정자들이 두어 개 카페도 만들고, 아파트 건설회사를 고발하고, 그러면서 시위나 전략 마련을 위한 모임을 갖는 등의 과정을 지켜보고, 그 모임에 참여하기도 하며 큰 혼란을 느꼈습니다. 하필이면 그럴 때 건강 때문에 마음이 스산했기 때문에 그 혼란이 더욱 컸을지도 모릅니다.
'여기도 아니라면 그럼 어디로 가야 하나?……' 몸도 마음도 한없이 지치고 망가진 상태에서 나는 기가막혔습니다.
Ⅲ
그 답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넓게 보는 사람은 문자(文字) 밖에서 참뜻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는 필자 자신의 발문에서 그 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발문은 필자 자신과 '불과헌산인(弗過軒散人)', '용문산인(龍門散人)' 李鳳煥, '동계기인(東溪畸人)', 정약용(丁若鏞) 등 다섯 사람이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李鳳煥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만약에 공자께서 다시 살아나신다면 반드시 동해(東海)에 뗏목을 띄워 건너오실 것이다. 그런즉 살 만한 곳으로서 어디가 이 지역만 하겠는가. …(중략)… 군자가 사는 도리로 산다면 앞에서 말한 살 수 없다는 곳이라도 모두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동쪽에서도 살 수 있고 서쪽에서도 살 수 있으며 남쪽·북쪽에서도 살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없다 할 것인가.
다음으로 '동계기인(東溪畸人)'은, 이중환은 명문(名門) 자제로서 불행하게도 문장 때문에 운명(運命)이 해를 받았음인지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살 집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말년에는 노농노포(老農老圃)로 되기를 원하였으나 그것마저 될 수 없었다고 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하여 택리지를 짓게 된 것이며, 서쪽도 마땅치 않고, 북쪽도 마땅치 않으며 동쪽과 남쪽에도 알맞은 곳이 없다 하기에 이르러서는, 어디로 갈 갈 곳이 없다는 슬픈 탄식을 하였다. 그런즉 인심이 험한 것과 세상이 박절한 것은 여기에서도 볼 수 있으니 그의 뜻이 너무나 슬프게 느껴진다. 그러나 거처한다는 것은 나의 육신(肉身)을 편하게 하는 것이니, 곧 외형적(外形的)인 것이나, 마음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이런 데에 있지 않는 것이니, 곧 내면적(內面的)인 것이다. 진실로 내면과 외형의 분별을 능히 살펴서 빈 배(舟)와 같은 심정으로, 경우에 따라 편하게 여기다면 세상의 창으로 쌀을 씻고 칼로써 불을 지피는 살벌(殺伐)한 광경이라도, 다 아름다운 경지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장차 촌늙은이, 고기잡이 첨지와 자리를 함께 할 터인즉, 또 무슨 살 곳을 반드시 가릴 것인가.
"군자가 사는 도리로 산다면 앞에서 말한 살 수 없다는 곳이라도 모두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할 것"이라는 李鳳煥의 글이나 "마음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이런 데에 있지 않는 것이니, 곧 내면적(內面的)인 것"으로 "진실로 내면과 외형의 분별을 잘 살펴서 빈 배(舟)와 같은 심정으로, 경우에 따라 편하게 여기다면 세상의 아무리 살벌(殺伐)한 광경이라도 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일 것"이라는 '동계기인(東溪畸人)'의 글은 동일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발문을 이중환이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도 이 책 『택리지』를 쓴 이중환의 재능이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약용의 발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는 소천 촌서(笤川 村墅)에 살고 있으나 물은 활 두어 바탕 되는 곳에서 길어오고 화목(火木)은 십리 밖에서 가져온다. 오곡은 심는 것도 없고 풍속이 상리(商利)만 숭상하니 대체로 낙도(樂土)는 못되며, 가취(可取)할 점은 오직 강사이 아주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로서 터를 차지하여 후세(後世)에까지 전하는 것은, 상고시대(上古時代) 제후(諸侯)에게 나라가 있는 것과 같은데, 이리저리 옮겨서 붙어살다가 능히 크게 떨치지 못하면 나라를 잃어버린 자와 같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이모 저모 돌아보고 머뭇거리면서 능히 이 소천(笤川 )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Ⅳ
그렇긴 하지만, 『택리지』는 또한 우리나라 산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곳곳을 살펴 기록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지금의 관점으로도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블로거들 중에는 맛집과 관광지 소개를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도 『택리지』 이야기가 거의 없는 걸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 곳에서 인용하고 싶지만 한 군데만 보여 드립니다. 강원도 영동의 삼일포, 경포대, 시중대, 화담, 영랑호, 청초호, 총석정,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등을 설명한 끝부분입니다.
바닷물이 아주 푸르러서 하늘과 하나로 된 듯하며, 앞에 가리운 것이 없다. 해안(海岸)은 강변이나 시냇가와 같이 작은 돌과 기이한 바위가 언덕 위에 섞여 있어, 푸른 물결 사이에 보일락말락 한다. 해안은 모두 빤짝빤짝하는 눈빛 모래로서, 밟으면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구슬 위를 걸어가는 듯하다. 모래 위에는 해당화가 빨갛게 피었고, 가끔 우거진 솔숲이 하늘에 솟아 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문득 사람의 생각이 변하여져, 인간 세상이 어떤 경계인지 자신의 형체(形體)가 어떤 것인지 모르도록 황홀하여, 공중에 오르고 하늘에 날 뜻이 있게 된다. 이 지역을 한 번 거치면 그 사람은 저절로 딴 사람이 되고, 지나간 자는 비록 십 년 후에라도 안면(顔面)에 오히려 산수 자연의 기상이 있다.
Ⅴ
물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때로는 고개를 젓거나 고소를 금치 못할 부분도 있습니다. 다음은 그런 예입니다. 다른 예를 더 들 수도 있지만 이 책의 그러한 내용은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천리 되는 물과 백리 되는 들판이 없는 까닭에 거인(巨人)이 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서융 북적(西戎北狄)과 동호 여진(東胡女眞)이 중국에 들어가서 한 차례씩 황제 노릇을 하였으나, 홀로 우리나라에서는 없었다. 오직 강역(疆域)만 조심해 지켜서 뜻을 감히 딴 데에 두지 못하였다.
- 「복거총론」 「산수」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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